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혼란한 사회에서 자신의 병마와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의 첫째 계명인 사랑을 가르쳐준 쥴리아 빌리아트는 1751년 7월 12일 프랑스의 「큿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양친은 농촌에서 조그만한 점포를 차리고 있었다. 일고살때 벌써 교리를 통달한 쥴리아 수녀는 어린 영혼이었지만 사랑이신 천주님을 알려고 노력했으며 또 하느님을 사랑하고 봉사하겠다는 뜻을 품었다.
아홉살때 첫영성체를 했으며 14세때는 동정서원을 했다. 1774년에 중풍을 앓기 시작하여 30년간을 계속 병상에서 지냈다.
병마의 시련을 받으면서도 하루에 4, 5시간 기구와 어린이를 위한 교리를 강행했다.
1804년 6월 1일부터 예수성심께 9일 기도를 바치던중 기적적으로 30년간의 중풍병이 나았다. 이해에 하느님을 위해 일생을 바치며 크리스찬 청년교육에 이바지할 것을 맹세하고 수녀로써 서원했다.
1816년 그가 죽을때까지 그의 여생은 정신적 영적인 면에서 고통으로 새겨졌으나 벌써 그때 「웃는 성녀」로 알려졋다.
1906년 5월 13일 교황 삐오 10세에 의해서 시복되었으며 오는 6월 22일에 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영광의 시성식을 가지게 된다.
그가 죽음을 앞두었을 때 노틀담 수녀회는 벨기의 「나무어」에 중심부를 두어 확장되었다. 1828년 「노틀담」 수녀회의 분원이 홀란드의 「암머스포트」에 세워졌으며 이 분원은 그때의 정치적 문제 때문에 본원과 떨어져 독립된 생활을 해야했으나 쥴리아 빌리아트 수녀의 수도회칙과 정신은 그대로 계속되었다.
홀란드에 「노틀담」수녀회가 세워진 22년후인 1850년에 독일의 「베스트팔 코스팰드」에서 두 젊은 여선생이 그들의 생애를 불쌍한 아이들과 고아들을 위한 사업에 바칠 것을 맹세하며 「암머스포트」 스녀들의 도움으로 수녀회가 창립되었다. 이것이 독일에서 노틀담수녀회가 창립된 동기이다. 그러나다시 나라 사이의 정치적인 문제로 「암머스포트」 수녀들은 홀란드로 다시 돌아가야 했으며 독일의 노틀담 수녀회는 쥴리아 빌리아트 수녀의 정신을 따르면서 독립된 생활을 해나가야 했다.
이리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자애를 증거하기 위하여 미국 · 브라질 · 홀란드 · 이태리 · 영국 · 인도 · 인도네시아 · 뉴기니아와 1967년에 한국에까지 진출하여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3개의 독립된 수녀회는 각각 4천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으며 총회원 수는 1만2천명이다.
「웃는 성녀」라는 애칭을 가졌던 쥴리아 빌리아트 수녀의 근본정신은 순박함과 즐거움이다. 이것은 강한 신앙 속에 뿌리를 박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느님으 인자하심과 인류에 대한 사랑」(띠또 4장 5절)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그분의 순박함과 즐거움의 정신이 우리의 유산이며 본회의 성격이다. 이에대해 쥴리아 빌리아트 수녀는 어려울때도 항상 『얼마나 좋으신 하느님이신가』 이렇게 간단하게 표현한 것으로 그의 정신을 잘 알아들을 수 있다. 이 말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계속되고 있다. 지금 1만2천명의 정신적 후계자(수녀)는 그리스도의 주위로 함께 모여 창시자의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청소년교육에 봉사하고 있으며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정신적 육체적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한다.
오늘날 이들 수녀의 활동은 그의 천상적 은혜인 애덕의 정신을 이어받아 앞으로 전개해 나가는 것이 소명이다. 생존시 그가 프랑스의 혼란한 사회에서 하나의 빛이 되었던 것처럼 이번 그의 시성식을 통하여 지금 어려움을 겪고있는 청소년 교육에 그의 교육이념이 반영됨으로 또하나의 현실적인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해 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