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에서 「병인박해」라고하면 꼭 병인년(1866)만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 아니요, 그해에 시작한 박해가 그치기까지의 전박해를 두루 넓게 가리켜하는 말이다. 이번에 李루갈따가 복녀가 되느냐고 묻는 분도 있었는데 금번 시복대상자는 본시 병인박해순교자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루갈따는 언급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다. 병인박해로 희생된 신자의 수는 사가에 따라 구구하여 적게는 8천명으로부터 19만이라는 터무니없는 숫자를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아뭏든 순교자의 수를 8천명으로 줄잡아 본다하더라도 어떤 의미에서 24위를 제외한 근 8천명이 모두 누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시복을 추진시키기 위해 최초로 만든 순교자 명단에는 877명이 올랐을 뿐이다. 「치명일기」(서울 1895년)의 명단을 기반으로 시복의 「조사수속」을 시작할 수 있도록 전국적으로 명단의 보충이나 수정을 호소했으나 결국 조사수속에 오를 수 있은 「천주의 종」(시복대상자)은 29명을 넘지 못했다. 그리고 조사 수속에서 또 3명이 누락되고 보니 「로마」 예부성성에 제출된 천주의 종은 26명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누락된 3명은 이베드로(성천) 이필립보(성욱) 송아우구스띠노(성포)이다.
이베드로는 이필립보의 형이며 본시 황해도에서 태어나서 경상도 봉화를 거쳐 제천 배론에 정착했다. 배론 아랫마을에서 회장직을 맡아 보았고 1867년 9월에 잡히어 충주에서 생매장을 당했다고 한다. 향년 약50세.
이필립보는 제천 배론에서 형을 대신해서 회장직을 맡아보다가 1866년말 제천포교에게 잡히었으나 석방되었다.
1867년 11월에 다시 잡히어 청주로 압송되어 거기서 순교했다고 한다.
송아우구스띠노는 본시 서울 태생으로 안성 진천 등지로 옮겨 살다가 마침내 제천에 정착했다.
1867년 초 제천 「안골」에서 남종삼의 부친 아우구스띠노와 함께 잡히어 충주로 압송되었고 이어 청주로 압송되어 거기서 순교했다고 한다.
이상 3인이 누락된 이유는 증언의 근거가 불확실한 때문이었고 증인 모두가 그들의 순교이야기를 전해 들었을뿐 확실한 것은 전혀 모른다고 하였다. 교황청에 제출된 26위중 예부성 최종 심사에서 불행하게도 신요한과 박미카엘 두분 신부가 탈락되었다. 탈락하게된 이유는 물론 그들의 순교사실 여부에 대한 검사의 질문에 변호사가 충분한 변호를 못한 때문이다. 「로마」가 결정한 일의 가부를 운운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헌상으로 볼때 이두 신부의 탈락은 아깝게 생각된다. 포도청 등록(수속서류에 이 문헌이 첨부되지 않았다)에는 『신자의 이름을 대는 것은 타인에 해가 되므로 매를 맞아죽는 한이 있더라도 고할 수 없읍니다』(同學之誰某被害於他人 故수死杖下 無以直告是白置)고한 두 신부의 초사가 있다. 비록 이것이 직접적인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는 없을 지라도 적어도 그들의 순교사실을 방증할 수는 없었을까? 끝으로 시복 청원자 측의 편파심이나 편견으로 누락되었다고 생각되는 순교자 두 명을 소개하고자 한다. 시복 청원자는 「빠리외방 전교회」 요청원서에 선택의 기준으로 삼은 문헌이 주로 달레의 「한국교회사」이다. 달레는 남요한(종삼)을 제하고는 당시의 교회지도급 신자들을 정치문제에 간섭했다는 이유로 좋지 않게 생각했다. 홍토마스(봉구)와 김토마스(면호)가 정부에 한불동맹 추진을 건의한데 대하여 달레는 그들이 냉담자이고 이전 박해로 가문이 몰락해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신교자유도 얻는 한편 애국심을 발휘하고 명성을 높일 야심에서였다고 평했다. 그리고 홍토마스의 순교에 대하여도 죽는 순간의 그의 마음의 태도가 퍽 의심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 측 사료는 『잠시 배교를 했다가 다시 어기는 것이 괘씸하다』(背敎一事之作徒施違 益莎痛완)고 함으로써 그의 개과천선을 충분히 시사해 주고 있다. 김토마스(면호)에 대해서는 훌륭하게 순교했다고 하면서 왜 시복수속 명단에는 누락되었을까?
하기야 24위 중 우리나라 사람이 17명이나 들어있는 것만도 외방전교회의 덕택이니 이제 와서 누구를 왜 빼놓았느냐고 불평하기에 앞서서 그나마도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닌가? 누락된 순교자를 써보라니 한번 넉두리를 해본 셈이다.
崔석우(한국천주교교회사연구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