丙寅殉敎福者(병인순교복자) 24位(위) 略歷(약력)
하느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리니 먼 荊莿(형자)의 길 끝에 님은 꽃으로 피네
「내가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일엽편주 萬里步行(만리보행)으로 密入國(밀입국) 선교하다 장렬히 치명
갖은 慘刑(참형)끝에 군문효수·참수·교수·杖殺(장살)
三代(삼대)가 멸족당하는 판에도 父子間(부자간)에 치명하기를 격려 肉親情(육친정). 人間的(인간적) 공포로 일시 背敎(배교)했다가도 痛悔自首(통회자수)
양반·학자·관리·極貧(극빈)의 庶民(서민)에 이르기까지…
①張시온(佛人·52) 주교
페레올·고 주교를 뒤이은 제4대 조선교구장 1837년 서품되고 월남에서 포교중 체포되어 석방된 후 요동땅에서 포교생활 10여년에 조선교구장에 피임. 황해도에서 선교했다. 천성이 강직하고 정열적이어서 24시간 계속 고백성사를 집행하기 다반사(茶飯事). 결국 당뇨병을 얻고 일생을 고생했다.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던 1866년 봄에 상경, 흥범주집에 머물면서 교세확장에 힘썼다. 대원군의 박해 기미를 눈치챈 신자들이 피신을 권했으나 『나로 인해 더 많은 사람이 해를 입을 것』을 걱정하고 이를 거절. 2월 23일에 피체, 3월 8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효首)했다.
사후 박베드로라는 신자가 시체를 거두어, 같이 순교한 徐·金·白 신부의 시체와 함께, 왓고개(瓦署현…지금의 용산 우체국 뒷고개)에 묻었는데, 이곳은 나라의 기와를 굽는 와서(瓦署)가 있어 후일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자 여기서 나온 벽돌로,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약현(中林洞)성당을 세웠다.
②安안또니오(佛人·48) 주교
불란서 상류가문 출신인 제5대 조선교구장. 1845년에 유명한 김대건 신부의 일엽편주 「라파엘」호를 타고 황해를 건너 입국. 윗병 신경통으로 늘 고생했으나 우리말을 가장 유창히 하여 「韓中佛辭典」을 만들고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 달레의 「조선 교회사」편찬에 공헌했다.
말이 너무 능통하여 관가의 미움을 남달리 심히 받은 주교는 병인 3월에 충청도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왕(高宗)의 병으로 양인(洋人)을 장안에서 죽임이 불길하다 하여 충청도 보령땅 갈매못(葛梅浦)에서 참수하니 병인 3월 30일 바로 예수 수난축일이었다.
③白유스또(佛人·28) 신부
불란서 상류가문, 법관출신의 남작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864년 서품되어 곧 만주로 달려와 張 주교의 지시를 기다렸다. 이듬해 5월에 당시 安 주교의 전교구역이던 충청도 내포에 입국하고 서울남대문 밖 鄭 마르꼬 회장댁에 기거하면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병인년 2월 26일 배교한 李선이(張 주교목사)의 밀고로 잡혀 張 주교와 같은 방에 수감되었다. 3월 8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되니 그리스도를 위하여 짧은 일생을 마쳤다.
현장에서는 곁에 있던 朴베드로가 몹시 목이 말라하므로 물을 자청해서 그에게 먹여주는 사랑을 보였다.
④徐루도비꼬(佛人·26) 신부
閔·金 신부와 함께 충청도 내포(內浦)에 상륙 경기지방에서 포교활동했다. 張 주교로부터 公州府 사목을 명받았으나 임지에 가지도 전에 박해를 당했다. 2월 28일 경기도 광주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고 張 주교를 비롯하여 동료두신부와 같은 방에 수감되었다. 혹독한 형벌과 문초로 두다리뼈가 부러지고 온몸의 살이 헤어졌으나 오히려 우매한 형리들을 동정했다. 병인 3월 8일에 張 주교와 일행 4명이 새남터형장으로 향하니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⑤金헨리(佛人·27) 신부
『나는 이제 부모님 곁을 떠나 조선땅으로 가니 이 다음 천국에서나 만나세』
1864년 서품과 동시 조선지방의 포교명을 받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일절이다. 가난한 농가의 여섯째로 태어난 김 신부가 조선땅을 밟은 것은 1865년 5월 충청도 내포지방이다.
서울 근교 손골에 자리잡고 우리말을 익히는 한편 풍습연구에 몰두했다. 결과 말은 서툴었으나 풍속은 가장 잘 익혀 당시 신자들의 인기가 대단했다는 젊은 사제. 신자들이 「金 신부」라고 부를 때마다 「조선에는 金씨가문에 순교자가 많으므로」 더욱 좋아했다는 신부 손골에서 잡혀 병인 3월 8일에 장 주교, 백, 민 신부와 함께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받았다.
⑥吳베드로(佛人·29) 신부
불란서 「삐낭」신학교에 유학중이던 두 조선인 신학생을 데리고 배로 연평 앞바다에 닿은 것이 1863년 6월. 충청도 거더리에서 사목했다.
병인 3월에 잡힌 安 주교가 閔 신부에게 피신하도록 편지하자 피신을 결심하고 배를 탔으나 거센 풍랑으로 배가다시 조선땅에 닿자 자수를 결심하고 표연히 거더리로 발을 옮겼다. 거기서 安 주교, 閔 신부, 황루까 그리고 배론의 회장이던 장요셉과 한방에 수감되었다가 충청도 갈매못으로 형극의 길을 걸어 3월 30일 예수수난축일에 참수, 승리했다.
⑦閔마르띠노(佛人·30) 신부
1861년 서품되자 전교지방을 자청 1863년 「빠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고 白·金·徐신부와 조선으로 건너왔다. 당시 거더리에 있던 安 주교 밑에서 우리말을 익히고 사목을 도왔다. 병인년 3월, 서울 張주교의 피체소식을 듣고 자수를 결심했으나 安 주교의 지시로 안전지대로 피신했다가 3월 14일에 安 주교 피체를 알자 곧 자수했다.
옥중의 모진고문과 매질에 실신하기 몇번,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불쌍한 우리민족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다. 일행 4명과 더불어 갈매못까지의 긴 여행을 시신(屍身)이다 된 몸으로 이겨내고 3월 30일에 참수되었다.
⑧劉베드로(正律·30)
평양지방 울리면 합현리에서 태어나 조부모 후 짚신을 엮어 생계를 이어나가던 중 1864년 상경하여 張 주교로부터 성세를 받고 귀향했다. 평소 성품이 난폭하여 아내를 모질게 구타했음을 뉘우쳐 입교 후는 신꼬리로 자기 몸을 편태 하였다.
박해의 먹구름이 일자 친척집을 찾아 인사하고 매일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1월 2일 고둔공소에서 기도 중에 잡혀 평양감방에 갇혔다. 그를 회두시키려고 갖은 수를 다한 관장이 결국 실패하자, 이미 배교한 1백여명의 신자들로 하여금, 한 사람이 한대씩 매질하게 하니, 병인년 1월 3일, 잡힌지 하루만에 배교한 무리들의 3백대 매질에 숨지니 그의 나이 설혼을 갓 넘었다.
⑨南요한(鍾三·50)
친척가운데 순교자가 11명이라는 기록을 가진 양반 출신의 학자. 일찍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은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왕족자제들을 교육하다가 입교하여 노비를 석방하고 서양신부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한편 홍범주와 더불어 포교에 힘썼다.
1860년 무렵 이 땅에 러시아의 진출이 늘어나고 무력한 조정이 속수무책일때 대원군에 상소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는 대신 프랑스의 힘으로 이들을 격퇴하려했다. 그러나 일이 순조롭게 되어 프랑스의 힘이 필요없게 되자, 대원군은 오히려 이를 미끼로 그를 박해했다.
병인년초, 고향인 충청도 제천으로 내려가 부친 南상교(아우구스 띠노)를 하직하고 상경중 박해소식을 듣고 경기 고양으로 피했으나 배교한 李선이(張 주교의 복사)의 밀고로 3월에 피체되고 홍범주와 더불어 수감되었다.
병인 3월 8일 서소문 밖에서 위주 치명했다. 그의 사후 아내와 자식들은 경상도로 귀양가고 늙은 부친과 맏아들 명희(明熙=14세)는 순교했다.
⑩崔베드로(炯·53)
수원지방의 태생 교우.
1836년 모방신부의 복사를 지내고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상해로가 페레올 신부 일행을 입국시킨 후 김 신부가 순교할 때까지 그를 수행했다.
그의 공로는 무엇보다 張 주교의 명을 받고 번역 간행한 무수한 교회서적에 있다.
오늘날 전하는 「聖敎工課」, 「省察記略」 등 수십권에 달한다. 병인년 2월말에 잡혀 옥고를 치루고 3월 10일, 이틀 전에 南요한이 죽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평생을 착히살고 성교회를 위한 출판사업에 기여한 그는 김대건 신부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했다가 병사한 신학생 崔프란치스꼬의 친형이다.
⑪全요한(長雲·56)
서울 태생으로 崔베드로와 더불어 張 주교의 명을 받고 성서출판에 공헌했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 피체되었으나 형벌에 못이겨 배교했다가 석방된 후 자책감으로 매일 통회하던 중 김대건 신부의 귀국으로 수계범절을 더욱 착실히 지켰다.
병인 3월 1일 성서 판각(板刻)을 사수(死守)하려다가 포졸에 잡혀 의금부에 갇혔다. 어깨, 다리, 발가락에 동시형벌을 가하는 「채장」이라는 무서운 고문에도 견뎌내고 3월 10일 嶺베드로와 같이 수 배위에 세운 십자가에 매달려서 소문 밖 형장에서 휘광이의 칼에 참수됐다.
⑫丁마르꼬(義培 72) 회장
순교복자 중 최고령의 老회장.
나이 40이 넘어 입교하여 고 주교의 명으로 서울회장이 되었다. 최고령이며 가장 모범적인 신자로 주교신부들까지 그를 존경해 마지 않았다.
경기 용인이 고향인데 자식이 없는 점으로 보아 결혼 후에도 동정 을 지킨 것으로 보고 있다.
천성이 착하고 겸손하여 남달리 수계 범절에 충실하여 매일 통회의 눈물을 흘렸으며 조선땅에 온 당대의 주교 신부들이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유명한 인물이었다.
2월 25일 자택에서 잡혀 노구를 끌고 의금부에 갇혔을 때 형리들은 사학(邪學)의 수괴(首魁)라 하여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다. 3월 11일 새남터에 군문효수되나 나이 72세였다.
⑬禹알렉시오(世英·22)
一名 세필로 불리며, 18세에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張 주교에게서 성세를 받고 부모의 질책에 못배겨 고향인 황해도 서흥을 떠나 서울 정마르꼬 회장댁에 기거하면서 성서출판을 돕고 부모님의 영신을 위해 기도했다.
1865년 평양에서 피체되었으나 참혹한 고문을 이겨내지 못해 순간적으로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즉시 후회하고 서울 정마르꼬 회장댁을 찾아갔다가 다시 잡혀 끝까지 신앙을 증거했다.
3월 11일 새남터에서 朴·申 신부와 丁희장에 뒤이어 참수 치명했다.
⑭黃루까(錫斗·54)
충청도 연풍땅 전통적인 양반가문의 3대독자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인물이 출중하고 총명하여 글을 많이 익혔다. 그러나 과거(科擧)를 보러 가던 길에 주막에서 신자를 만나 그만 교리에 심취되어 「과거길」을 포기하는 패륜아(?)가 되니 부모와 친척들은 그를 매질했으나 이에 불응, 3년간 벙어리 노릇을 한끝에 부모의 뜻을 꺾고 입교할 수 있었다.
입교 후 한때 회장직을 맡고 安 주교의 출판사업을 도우면서 선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3월 14일, 安 주교가 잡히자 자수를 했지만 포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10여리를 따라가며 애원하여 마침내 병인 3월 30일 갈매못에서 선종했다.
⑮張요셉(周基·64) 회장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교가 있던 충청도 배론의 회장으로 1826년 입교했다. 완고한 친척들의 압력으로 배론으로 옮긴 그는 1855년에 자기 집을 신학교 건물로 교회에 바쳤다. 미사시간이 되면 손수 북을 치며 마을을 돌아다녔으며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병인년 3월 배론학당의 申·朴 신부가 붙잡힐 때 당시 교장이던 申 신부의 권고로 피신했으나, 며칠 후 포졸들이 자기를 잡으러 오자 순순히 자수, 서울로 압송됐다.
3월 30일 마침 홍주 거더리에서 잡혀온 安 주교, 閔·吳 신부 황루까와 함께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참수치명할 때 휘광이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는 성교회의 영광을 위해서 이렇게 죽는다.』
⑯孫토마스(자선·23)
병인 3월 安 주교를 잡아간 관가는 安 주교에게서 몰수한 교회 재산을 찾아가라는 기별을 보냈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선뜻 나서지 못했다. 이에 토마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가로 출두했지만 관원들은 굴러들어온 사학죄인(邪學罪人)을 의심없이 잡아넣었다.
얼굴에 오줌을 누고 두 다리를 꺾었지만 끝내 그는 고집을 부렸고 잔악한 고을 원이 그에게 배교치 않는다는 증거로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으라는 조롱을 하자 『그것 역시 천주께 대역하는 것이거늘』하고 거절했다. 화가 난 원이 『그러면 배교하는 걸로 인정하겠다』고 하자 『그러면 순종할 수밖에 없소』하고 두 팔을 물어 살을 뜯어내었다. 마침내 관가는 그의 목을 옭아매어 죽이니 병인년 4월 5일 공주감영에서였다.
⑰조베드로(화서·52)
수원에서 태어나고 기해년(1839)에 치명한 조안드레아의 아들로서 최토마스(양업) 신부의 복사를 지냈다. 병인 12월 5일에 아들 요셉(윤호)과 이베드로(명서), 정발도로메오(원지)와 함께 잡혀 전주로 이감되었다.
문초하면 관원이 『너는 네 아들과 함께 죽으면 자손도 없는 집안이 아니냐』하며 배교를 권하자 『나는 이 세상에서는 죽지만 죽은 후 다시 살 자리가 있읍니다.』고 하며 아들인 베드로(윤호)를 격려하고 현장이로 나갔다. 12월 13일 마침 장날이라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숲정이에서 참수되나 그의 목을 치던 휘광이 마저 『이 악당아, 지금 이 형장에서까지도 종교를 지키느냐』고 하며 답답해했다.
⑱李베드로(재덕·46)
평생을 가슴앓이 병으로 고생한 그는 충청도 구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병인년 대원군의 박해기미를 알았으나 충분한 피신의 여유를마다하고, 위주치명을 착실히 예비하고 있었다. 워낙 중병인지라 압송도중에도 들것에 얹혀갔고 고문도 제일먼저 받았다. 노력에 중병까지 있으면서도 혹독한 형벌을 자청, 자기 죄를 보속했다고 한다. 감방에서는 같이 수감된 신자들을 일깨워 조·만과를 합송하고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었다.
때로 집에 남기고 온 처자와 자기의 병이 중함을 들어 석방도 요구했으나 즉시 돌이켜 뉘우치고 전주서문 밖 숲정이에서 치명하여 영복을 얻었다.
⑲鄭발도로메오(문호·66)
한때 고을 원을 지낸 외모가 단정하고 예의바르며 이웃을 도와 외교인으로부터도 칭찬을 들어온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
전주 대성통에서 다른 교우와 함께 잡힌 후 전주 감영에서도 조·만과를 게을리 않고 굳센 신앙을 간직했다. 노령이라 견디지 못해 한번은 배교도 결심했으나 조베드로(화서)의 권고로 곧 회두하고 눈물로 속죄했다.
병인년 12월 13일 현장으로 향하던 그는 『오늘 우리는 하늘에 과거보러 간다』면서 태연자약했다. 한베드로(원서)의 뒤이어 숲정이에 참수했다.
⑳孫베드로(선지·47) 회장
16세때부터 회장직을 맡았던 청년사도로 12월 5일 성지동에서 잡혀 전주감영에 옮겨와 치명한 곳은 숲정이다. 감옥에서도 그를 두목이라 하여 극심한 형벌을 받았고, 팔이 부러져 옆에 있던 사람이 밥을 떠먹여주었다.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형장으로 향하던 12월 13일에는 입었던 두루막을 남아있는 교우에게 벗어주었고 술에 취해 어깨를 내려친 휘광이를 호통쳐가며 네번째의 칼에 마침내 목이 떨어졌다.
㉑韓베드로(재권·31)
옥증을 찾아와 눈물로 배교를 애원한 늙은 부천을 끝내 돌려보낸 후 밤을 새워 울었다는 회장. 청도에서 나서 전주 대성동 신리로 옮겼는데 그 곳은 손베드로(선지)가 회장으로 있어 회장을 그만두고 겸손히 손 회장의 말을 들었다.
병인 12월 5일 장작을 깨고 있을때 들이닥친 포졸을 보고도 하나 놀라지 않았을 만큼 평소에 순교예비를 잘하고 있었다. 놀라기는 커녕, 웃으며 붙잡혀가서 모진매를 맞고 정신을 잃기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공의하신 천주님은 그에게 순교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주셨으니 때는 병인 12월 13일, 전주고을 서문 밖 숲정이에서였다.
㉒鄭베드로(원지·21)
늙으신 홀 어머니께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몇 번인가 배교를 결심했다가 회두하고 그야말로 통회의 눈물로 감옥바닥을 흥건히 적신 분이다. 별부유하지 못한 가정에서 처자와 홀어머니를 모시고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열심한 신앙을 지켜온 촌부.
포졸이 신자를 잡으러 올 때, 마을 뒷산으로 숨었다가 동정을 살피러 산을 내려오던 중에 마침 그를 찾아 산을 오르던 포졸에 잡혀 전주로 이감되고 마지막 순간에 통회를 발했다.
병인 12월 13일 전주 숲정이를 붉게 물들인 영광을 받기 몇 시간 전에 『천국에서 다시 만날테니 너무 걱정마오』라는 편지를 가족에게 남겼다.
㉓조요셉(윤호·19)
시복자 베드로(화서)의 아들로 순교 당시 19세였다.
아버지와 같이 잡혀갔으나 『나랏법에 부자(父子)를 한 칼에 죽일 수 없다』는 말에 어버이에 대한 지극한 효성과 존경으로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치명의 영광을 먼저 아버지께 양보했다.
「나를 따르라」는 부친의 영을 어기지 않고 참고 견디다가 12월 18일에 숲정이에서 부친의 뒤를 따르니 시복자중 가장 어린 분이다.
㉔李요한(윤일·45)
키가 크고 목청이 굵으며 턱수염을 위엄있게 기른 호걸타입의 회장으로 남보다 배나무거운 칼을 채웠지만, 항상 너털웃음으로 함께 갇힌 교우를 위로하며 끝까지 여유있게 버틴 분이다. 병인박해가 지방(경상·전라)으로 퍼지기 시작한 음력 10월초에 경상도 문경 땅에서 잡혔다.(충청도 홍주태생) 상주감영을 거치는 동안 많은 교우들이 배교하고 풀려갔지만 그는 우두머리라는 이름과 굳센 고집 때문에 대구감염으로 넘어갔다. 매월 초하루, 보름, 그믐에 있는 혹독한 고문과 수시로 당하는 모진매질에도 이겨냈었고 참수되던 1867년 1월 21일에는 마지막으로 진수성찬을 대접받는 특전도 얻었다. 휘광이가 칼을 들자 들고 있던 돈 주머니를 주면서 『한칼에 베어 달라』 부탁하고 노고를 치하하면서 여유만만히 치명하나 곳은 대구 남문 밖이었다.
揷畵·鄭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