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란교회를 쇄신(刷新)의 선구자로 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이단(異端)에 흘려 멋대로 날뛰는 난폭자로 보는 이들도 있다. 25만부 이상이 팔린 화란의 성인용(成人用) 새교리서는 오늘날 많은 비판의 촛점이 되고 있다. 화란의 두 프란치스꼬 회원은 화란교회의 쇄신지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여러 교회, 특히 가톨릭교회는 수세기 동안 「찬란한 고립」 속에 살아왔다. 그동안 우리는 일반적인 인간생활을 떠나, 다른 그리스도교회의 신자들과도 분리된 채, 세상과는 동떨어져 살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의 모든 진리는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세상에는 우리와 관련되는 「메시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진리와 완전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가톨릭교회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우리는 프로테스탄트교회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었다.
이러한 종교적 고립은 조금도 이롭지 못할뿐 아니라, 사실은 교회에 위험을 주는 것이었다. 이같은 현실을 자각할 즈음에 등위(登位)한 교황 요한 23세는 교회의 창문을 열어젖히고 출입구를 개방하여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 제2차 「바티깐」 공의회는 그가 바라던 「개방」의 표본이었다.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 형제를 이단자(異端者)로서가 아니라, 여러모로 「그리스도의 교회」와 연결된 백성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칭호를 받기에 합당한 자들이라고 인정하였다. 이렇게 교회는 이때까지 폐쇄했던 것을 개 방하고 있다.
■ 世俗에의 開放
①典禮運動
「찬란한 고립」이란 말 마디는 신자들의 좌석과는 아주 동떨어져있는 지성소(至聖所)를 뚜렷이 구별하기위해 쓰였다. 『미사를 봉헌할 때 예절의 일부는 잊고 넘어가더라도, 영성체 난간만은 넘어가서는 안되오. 신자들의 자리는 우리들 사제의 자리와는 다르니 말이오!』 교회의 평면도는 바로 이러한 태도의 상징이었다. 전례와 생활도 엄연히 분리되어 있었다. 알아듣지도 못할 말(라띤어), 신자들을 등지고 기도드리는 사제, 아름답긴 하나 시대에 뒤떨어진 음악, 이해할 수도 없는 말을 들으며 미사 끝의 강복을 기다리는 가운데, 마치 「쇼」를 구경하는 듯한 펑신자들…
이번 공의회가 있기 오래전부터 여러나라의 사제와 평신자들이 전례와 신자들 사이를 이어줄 새로운 다리를 찾으려고 애써왔다. 화란에서는 각종 회의와 본당의 전례주간 강론 및 잡지의 논설 등으로 「신자들이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필요성」을 널리 강조하고 있었다. 이번 공의회는 이러한 능동적 참여에 의견을 일치하고, 계속적으로 이 운동을 벌이도록 격려했다.
그래서 우리는 예규(禮規)를 바꾸고, 노래를 알맞게 고치고, 제대를 들렸을 뿐만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참뜻을 더욱더 연구하고 토론함으로써 전례를 우리의 실생활에 보다 잘 적응시켜 신자들의 사고(思考) 및 생활방식과 더욱 합일케 하는 길을 찾으려고 애써왔다.
성찬식의 은총은 신자들 앞에서 미사성제를 드릴때 자동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표적(表적)을 매개로 하여 우리에게 내리는 것이다. 그런데 성찬식의 행동과 말마디는 오직 그 자체가 이해될 수 있는 뜻을 지닐 때에만 인간적이 될 수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주교들의 동의를 얻어 전례의 새로운 길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즉 새 기도서를 만들고 그때그때에 맞는 성경을 읽게 하고 빵과 거의 비슷한 면병을 사용한다. 우리는 『너희는 받아먹어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의(字意)대로 알아듣기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손으로 성체를 받아먹게 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조치들은 위험스런 것인가? 그렇다. 그러나 전례개혁을 피하는 것 역시 위태로운 일이다. 가만히 두면 전례와 생활간의 거리가 영구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제마다 제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우리는 교회공동체라야 하고 따라서 전례는 우리로 하여금 참된 공동체가 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평신도와 사제들은 그들의 주교와 더불어 보편적인 「로마」 가톨릭전례를 지방사정에 적응시키는 방법을 찾아야 하고, 특수한 전례형식이 성찬식에 참여하는 개인적 신앙을 실제로 표현하는 것이 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언어와 예배자세를 전세계적으로 통일하려는 외적(外的) 일치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지방사정에 적응함으로써 내적(內的)인 마음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교회의 단일성은 외적 일치로 유지되거나 보장될 수는 없다. 화란교리서는 모든 신자가 전례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충분한 뒷바침을 주기위해 이와 같은 점을 중요시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