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自由의 참뜻
신앙의 필요성을 논하는 데는 여러가지 중요한 면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면에서는 혹은 개인적면에서는 인간의 전 생활과정을 통하여 볼때 인간은 전적으로 자유롭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우리는 결단(決斷)의 순간에 우리가 지니는 자유의 참된 의미를 경험한다. 사르뜨르는 사람이 신을 거부할때만 비로소 자유롭게 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이와는 반대임을 증명한다. 우리는 신의 뜻대로 결단을 내릴때에 비로소 우리의 자유를 참되이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실상, 우리의 자유를 새롭고도 고귀한 바탕위에 부흥시키고 소생시켜주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바로 우리와 함께 세상에서 활동하는 신에 대한 인식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에는 보다 심오하고 보다 풍부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리자신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 내포된 어떤 의미이다. 신은 이미 우주 안으로 들어와 있다. 우리는 그의 현존(現存) 앞에 스스로를 드러내놓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타자(他者)」 즉 우리를 초월하는 「영원한 당신」의 현존 때문에 인간의 자유가 어느 정도 제한되고 억압당함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어떤 해방감을 체험 한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 개인의 운명과 세계의 미래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책임이 마치 생명 그 자체마냥 하나의 전부적(天賦的) 선물임을 인식한다.
그것은 사르뜨르가 인간이 지녀야할 숙명이라고 설명한 모든 위태로운 모험과 고독을 불러일으키는 선물이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그 선물을 「부여한 자」와의 감사에 넘치는 대화(對話)를 통해서만이 충분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선물이다. 만일 자유가 우리의 고독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자립적(自立的)인 존재가 아님을 의미한다. 자유의 가장 훌륭한 표현, 즉 자유의 성장(成長)과 신장(伸張)의 조건은 우리 자신을 「신성한 타자(他者)」에게 헌신과 신뢰로써 개방함이다.
■ 祈禱의 役割은 무엇인가
이 문제는 신앙의 두째 요인(要因)을 우리에게 제기한다. 기도는 기적을 행하지는 않는다. 신앙을 가질 수없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기도의 본질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다.
그들은 기도란 우리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도구(道具)로, 우리 자신의 무책임을 엄폐하려는 수단으로, 신을 이용하는 헛된 노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에 따라 신은 우리의 근심과 고통을 신기하게 없애버림으로써 우리에게 보답한다는 것이다. 실은 그렇지가 않다.
신에 대한 신앙이 상황(狀況)을 바꾸어 놓지는 않는다. 오직 우리를 변화시킬 따름이다. 우리가 위기를 당할때, 절망과 부조리(不條理)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우리의 근본 바탕을 고수(固守)할만한 조용한 용기를 주는 것이 바로 신앙이다. 신앙은 인간 실존의 본바탕에로 우리를 되돌려 버린다. 우리 자신의 자유 안에서 우리를 용납하는 신은 위기에 직면한 우리가 자신에게로 돌아가 더욱 인간다워지고 더욱 인간다운 세계를 창조하도록 촉구한다. 기도는 신과의 신비스런 대화(對話)이며 또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그분에게 개방함으로써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신에 대한 신앙에는 여전히 가장 큰 번민을 안겨주는 점이 남아있다. 신앙의 불확실성과 언제나 가셔지지 않는 회의(懷疑)의 위협이 바로 그것이다. 잉마르·베르그만의 영화 「버진·스프링」(처녀봄)에는 타락한 두명의 염소직이에게 겁탈된 후 살해당한 딸의 시체를 발견한 아버지가 분노와 슬픔에 어쩔줄을 몰라 하늘을 저주하며 주먹을 치켜 올렸다가 이윽고 갑자기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신앙도 이와 같은 것이다. 위기를 당할때 그 누구나 그럴싸한 두갈랫길 앞에서 양자택일의 고민에 사로잡힌다. 그는 신앙과 절망의 양극을 어쩔줄모르며 방황한다. 신을 택하는 경우 그것은 언제나 미지(未知)의 세계로의 어떤 비약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이것은 남은 말할 나위도 없고 나 자신에게 마저도 충분히 합리화시킬 수 없는 하나의 비약이다. 신앙은 자아(自我)의 중심부 그 안에서 인간 개성의 숨은 샘에서 솟아오르는 천부적 선물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또는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다.
신앙행위가 불가해(不可解)한 것이라 해서 그것이 곧 맹목적이거나 불합리한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비록 이성(理性)의 윗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내가 결코 완전히 노출시킬 수 없는 내 생명의 심부(深部)에 그 자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사실 위기에 처했을 때의 나 개인의 반응은 자아(自我)가 지닌 신비와 직결돼 있다. 그것은 위기의 순간에 따라 신앞에서 내가 처신해야 할 바를 명확히 반영시켜 준다. 신앙의 위기는 나의 전생활을 결단의 순간에 의하여 해명되지는 않는다하더라도, 나의 과거에 의해 매우 잘 설명될 수는 있다. 아무도 신앙의 행위를 틀림없이 예언할 수는 없다. 우리는 오직 그것을 준비할 수 있을 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