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祝(경축) 한국가톨릭 敎階制(교계제)設定(설정)
韓國(한국)가톨릭 敎階制度(교계제도) 敎皇(교황) 設定令(설정령)을 執行(집행)
주한교황사절대리 챨스. 버튼. 무튼 司式(사식)으로
殉血(순혈)로 거둔 結實(결실)
明洞大聖堂(명동대성당)서 莊嚴禮(장엄례)
南北韓全域(남북한전역)에 敎階令(교계령) 宣布(선포)
各界(각계)·外交使節(외교사절) 參列裡(참렬리)
밋숀 · 外援(외원)은 斷續(단속)
6월 29일 하오 4시 서울대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한국가톨릭 교계설정식이 피선(被選) 3대주교, 주교(全州 韓공烈 主敎는 體歐中) 그리고 성직자 수도자와 평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주한교황사절 직무대리 C. B. 무튼 몬시뇰 집전으로 거행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 혁명정부 각 부장관, 주한 각국 외교사절, 각계 초청인사 5백여명은 서울 씸포니의 장엄주악리에 참렬하였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3대주교관구의 완전한 교계(敎階) 체제하의 제1일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 무튼 使節代理 演說 全文
요안 23세 교황 성하께서 한국에 성직계제(聖職階制)를 수립하신 교황칙령 「훼르띠래 에반젤리 세멘」을 시행(施行)하는 전례적 식전에 즈음하여 1962년 6월 29일 서울 무염시잉태대성당에서 행한 주한교황사절 직무대리 찰스 버튼 무튼 몬시뇰의 강론.
가장 공경하올 한국의 대주교 및 주교 각하 여러분, 공경하올 한국의 성청임명 임시교구관리장 여러분, 공경하올 몬시뇰 여러분, 공경하올 신부 여러분, 존경하는 수사 여러분, 친애하는 수녀 여러분, 한국 정부의 대표자 각하 여러분, 대사 각하 여러분, 존귀하신 외교단원 여러분, 나의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한국의 성직계통 수렴에 대하여 전능하신 천주 대전에 이 사은미사 성제의 봉헌 직후인 오늘 오후에 한국의 교회 및 정부당국자들이 모이신 이 가장 엄위한 석상에서 말씀드리기는 주한 교황사절의 직무대리로서의 본인에게 분에 넘치는 영광인 동시에 기쁩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역사적 식전은 황공하옵게도 요안 23세 성하께서 한국에 성직계제 칙령수립을 명하시는 교황 「훼드딸레 에반젤리이 세멘」을 시행하기로 성청에서 본인에게 내린 지상(至上) 명령을 봉행한 것입니다.
이 교황칙령의 결과로서 교황성부께서 한국의 모든 대목구를 대주교구 및 주교구로 승격하셨고 새로 수립된 모든 교구의 대주교 및 주교로서 현직 대목주교들을 임명하셨읍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 한국에 다음과 같이 각자의 예속교구들을 거느리는 3대주교구로써 구성된 3재주교 관구를 보게 되었읍니다.
이북의 평양 및 함흥 그리고 이남의 춘천 · 대전 · 인천을 예속교구로 거느리는 서울대주교구, 부산 및 청주를 예속교구로 거느리는 대주대주교구, 전주를 예속교구로 거느리는 광주대주교구
오늘 남한에서만 반수 이상이 한국인인 5백여명의 사제들이 보살피는 그들의 50만여명이 가톨릭 신자들이 있읍니다. 이 나라에는 오늘 천여명의 한국인 수녀들과 약 1백50명의 전교수녀들이 있읍니다.
북한에는 비록 확실성을 띈 숫자를 인용할 수는 없으나 대략 5만7천여명의 가톨릭신자들이 남아있다고 계산되고 있읍니다.
그러나 이 모든 50만명의 가톨릭신자들 3위의 대주교들과 6위의 주교들 5백명이상의 사제들 및 1천백50명 이상의 수녀들- 이것은 투슨 신속하거나 조급한 전교의 결과가 아니며 신덕을 위한 헌신, 희상, 후덕, 사랑, 그리고 순교에까지 이르런 역사가 그네들에게 부여한 의의를 빼놓고는 오늘의 한국 가톨릭 교회의 이러한 영광스러운 통계도 있을 수 없읍니다.
한국교회의 성장이 최근 수년간 방대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1957년도만 하더라도 한국의 가톨릭 신자는 28만5천명에 불과했읍니다. 스 수가 최근 5년간에 거의 배가 되었읍니다.
남한의 약2천5백만 주민 가운데 50만의 가톨릭신자가 있다고 생각할 때 가톨릭 신자 수는 전 인구의 약2퍼센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한국인 가톨릭신자들의 굳센 신덕과 헌신과 신심과 결합된 가톨릭 신앙의 특수한 활동력은 한국 가톨릭교회를 위하여 이나라에 있어 가톨릭신자의 작은 퍼센테이지를 멀리 능가하는 존경과 인식의 지위를 창조했읍니다.
사실상 우리는 한국의 가톨릭교회는 이제 바로 1백년을 경과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1세기라면 인간의 수명으로 보아 길게 보일지도 모르나 가톨릭 교회의 2천년 역사로 보아서는 1세기란 그야말로 짧은 기간입니다. 그런데 불과 한 세기전까지도 한국에서 가톨릭 교회는 아직도 갖난아이의 시절이었읍니다. 그리하여 오늘 성직계제의 창설로서 한국의 교회는 1백년동안에 커다란 발전을 했다고 우리는 결론지을 수 있읍니다.
1831년에 성청은 한국의 대목구를 설정했읍니다. 모든 초대의 주교들과 선교사들 -파리외방전교회의 전원-은 순교가 아니면 추방을 모면할 수 없었읍니다.
1845년에는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안드레아 신부가 훼레올 주교와 두불루이 신부를 한국에로 동반했읍니다. 김신부는 마까오의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다음해-1846년에- 순교했읍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지금 서울 대신학교성당의 중앙제대의 밑에 누어있읍니다. 그는 시복되었고 한국에 거주하는 전체의 가톨릭 신자들로부터 많은 경앙과 치성(致誠)을 받고 있읍니다.
다른 프랑스 선교사들은 이 나라에의 잠입에 성공하여 -1845년부터 1866년까지- 20년간 2만3천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을 정도로 한국에서 가토리시즘이 번영했읍니다. 바로 그해 -1866년-에 가까스로 가장 악질이며 가장 피비린내 나는 박해가 터져 순교자들 가운데는 2위의 주교들 7위의 선교사들 그리고 1만명 이상의 가톨릭 신자들을 헤아리게 되었읍니다. 한국에는 또 다시 사제들이 없게 되었읍니다.
1866년 이후에 교회는 견실하게 발전했읍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에 보태어 독일서 미국서 애란서 그리고 많은 다른 나라에서 선교사들이 또 왔읍니다.
1892년 설립된 용산의 신학교는 번영하여 1940년경에는 1백39명의 한국인 신학생들이 있었읍니다.
1942년에는 역사상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오늘의 서울대주교 노 바오로 각하가 대목주교로 성성되었읍니다.
1945년에는 한국의 양단으로 이남에서는 전교가 번영을 계속하였지마는 이북에서는 전교가 중단되었읍니다.
1949년에는 주한교황사절관이 설치되었읍니다 메리놀회의 바드리시오 번 주교 각하가 초대의 교황사절이 되었읍니다 그는 죽음의 행진과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박대의 결과 1950년에 세상을 떠났읍니다.
한국에 평화가 돌아옴으로써 교회는 커다란 발전을 계속했읍니다. 한국에는 실지로 많은 남자 수도회와 여자 수도회가 일하고 있읍니다.
또 2개의 대신학교가 있는데 하나는 서울에서 한국인 재속 사제들의 지도 아래 있고 하나는 광주에서 예수회 신부들의 지도아래 있어 사제가 되려는 3백명 이상의 한국인 청년들을 교육하고 있읍니다. 각종의 수녀가 되려는 성소도 매우 수가 많습니다.
감독권을 띤 성직계제(聖職階制)의 수립으로서 전교국에 외국인 선교사들의 원조와 지지 그리고 외국자금의 필요가 그쳤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비록 법적으로는 성숙기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새 지방 교회들은 자체를 결정적 승리의 길에 놓게할 유일한 조건인 생명과 조직의 충실성으로부터 아직도 거리가 멀기 때문에 선교사들의 협력은 중지할 수 없고 또는 그 발걸음을 느리게 할 수도 없읍니다.
한국교회의 이 간단한 역사에 비추어 그리고 이 아침에 밝은 나라에서 이 위안을 주는 통계에 비추어 한국에 성직계제 창설의 역사적 의의를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께서는 전원이 다 덜른 인식하시라고 그리고 한국의 주교들 성직자들 및 교우들에게 교황 성부께서 주고자 하신 이 큰 명예는 한국의 많은 수교자들의 피로써 가꾸어진 한국 가톨릭교회에 대한 주권의 인가이며 공식 승인으로서 변치 않으리라고 본인은 믿습니다.
慶祝典順序
▲하오4시 대례미사
▲미사후 강론 무튼 교황사절 직무대리(尹恭熙 신부 통역)
▲ 각 교구장 任命令 수여
▲대주교 빨리움 수여
▲ 떼 데움 강복식
▲하오6시 경축연(명동문화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