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NC】 지난 5월 26일 예수승천축일에 <요안 23세> 교황성하는 자기 고향교구의 주교 한분을 성인품에 올리셨다. 그 시성식이 2세기여(餘) 이래 처음으로 <성베드루>대성전 밖에서 거행되었다. 「라테란」대성당에서 집전된 <그레고리오 바르바리고> 성인의 시성식 강론에서 교황은 정신적 가치를 경시하고 그리스도교적 덕행의 실천상 세속정신과 타협하는 현대의 경향을 경고하셨다. 이번 시성식이 그에게 특별히 개인적 기쁨이었음은 자기가 탄생한 「베르가모」교구의 전주교이며 또 자기가 등극하기 전까지 총대주교로 있던 「베니스」 태생을 시성하기 때문이었다. <그레고리오> 성인은 1625년에 탄생 1655년에 사제로 서품되어 30세에 주교로 축성되어 35세에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파두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뒷날의 <아렉산더 7세> 교황 <화비오 키지>의 권고로 신품을 받기 전에는 외교사절을 수행하여 「독일」에 간 일이 있었고 1697년 서거할 때까지 33년간 「파두아」의 주교이었다. 동 성인은 자기 교구의 신학교에 관심을 가지고 「트렌트」공의회의 개혁을 「베르가모」와 「파두아」에서 실천하였다. 「파두아」에서는 신학교를 대학으로부터 「반초」 수도원으로 옮겼고 그 신학교는 「라틴」어 및 「그리크」어의 연구로 18세기를 통하여 유행하였다. 그가 세운 신학교 운영법은 많은 교회학교에 응용되었다. 1684년에 그는 그 신학교 부근에 인쇄소를 설립하여 고전 및 교부들의 연구서적을 출판했다. 그 인쇄소에 「그리크」 「아라비아」 「시리아」 「아르메니아」 「페르시아」의 자모(字母)가 있었음은 그가 동방이교의 신자들을 복귀시키는데 관심을 가졌던 연고이었다. 그가 참가한 1667년, 1669년, 1679년, 1689년, 1691년의 교황선거에서 그는 세번이나 교황으로 피선될 번 했었다. 만일 그가 일찍 서가하지 안했더라면 그의 노력으로 「그리크」 이교가 「라틴」교회와 일치했을지도 모른다. 1761년에 시복된 그의 시성 심사가 1912년에 개식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