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4일 자동차 사고(事故)로 인하여 당년 47세로 조사(早死)한 「알베르 까뮈」는 「프랑스」의 보도망(報道網)을 요란케 하였다. 1월 5일 서울 방송국이 이 소식을 전국에 전하였고 익(翌) 6일에는 한국신문들이 이 작가(作家)가 미친 영향(影響)을 회상(回想)하는 동시에 동정적(同情的)인 증거(證據)를 들어 이 비보(悲報)를 보도(報道)하였던 것이다. 불의(不意)의 사고(事故)로 조사(早死)하여 우리들을 놀라게한 이 작가에 대하여 세상사람들은 하나의 정신적투쟁(精神的鬪爭)과 종교적공허(宗敎的空虛)의 해설자(解說者)라고 알고 있었다. 그들은 「까뮈」가 정신적착란(精神的錯亂)에 빠져있는 현대에 대한 영리(怜悧)한 증거자이며 냉정(冷情)한 판단자(判斷者)라는 점에 있어서 좋아하였다. 우리가 「까뮈」를 중시(重視)하는 이유도 오로지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교회의 신앙은 모든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까위」가 널리 알려진 무신론자(無神論者)이었다는 것과 속단(速斷)하고 객관성(客觀性)이 없는 동시에 그와같은 작가로서는 납득(納得)이 잘 안될 정도(程度)의 무지(無知)를 표시하는 부정적(否定的)인 방법으로 항상 그리스도교 신앙을 비판한데 대하여는 그대로 묵과(默過) 해버릴 수 없다. 더구나 이와같은 그의 태도(態度)는 그가 교육받은 무종교적(無宗敎的) 환경(環境)이 낳은 하나의 반사(反射)와 산물(産物)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까뮈」의 문학작품(文學作品)이며 신(神)과 결연(結緣)된 환경 속에 자리잡고 있다.
「로시아」혁명의 무서운 살육(殺戮)과 두번의 대전(大戰)에 있어서의 방임(放任)된 무정부상태(無政部狀態)로 인하여 반감(反感)을 샀기 때문에 「까뮈」는 먼저 삶의 불합리성(不合理性)을 들어내기에 노력하였던 것이다.
자살(自殺)은 하나의 자기도피(自己挑避)에 불과(不過)하다 시인(是認)할 수 있는 유일(唯一)한 태도(態度)는 『인간(人間)으로서의 질문과 세상의 침묵(沈默) 사이에 일어나는 절망적(絶望的)인 대결(對決)이다.
이것이 그의 수필(隨筆)『「시지푸」의 전설(傳說)』이 다룬 과제(課題)이다. 항상 이 금욕주의자(禁慾主義者)의 선상(線上)에 선 「까뮈」는 그이 작품 『흑사병(黑死病)』의 이야기 가운데서 그 흑사병 환자(患者)들을 위하여 감탄(感嘆)할만한 헌신적(獻身的)인 봉사(奉仕)를 하는 무신론자(無神論者)인 의사(醫師)의 경우를 들어내었다.
그러나 이 『흑사병』 주인공(主人公)을 떠나 지나치게 완전하여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까뮈」가 『흑사병』과 정반대(正反對)의 작품인 『추락(墜落)』을 쓸 수 있었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 가운데서 자기 주위(周圍)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오던 한 인물이 급자기 사람들이 자기에 대하여 말하는 덕성(德性)이란 하나의 위선적(僞善的)인 가면(假面)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자백(自白)하며 여태까지 조심스러이 속여(假裝)나온 잘못의 비열(卑劣)한 고백(告白)을 시킨다. 「까뮈」는 그가 예상(預想)한 인도주의(人道主義)의 실패(失敗)를 인정하였다고 할 수있을까? 단언(斷言)할 수 없다. 사실(事實)은 그 중심인물(中心人物)의 거직 고백 중에서 작자는 선(善)도 악(惡)도 아닌 자리에 위치(位置)하여 어느 누구도 그 인물보다 더 나을바 없다는 것을 밝힙면서 이리부터 타인(他人)에 대한 모든 비방(誹謗)을 중화(中和)하려 한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까뮈」는 그의 수필(隨筆) 『반항자(反抗者)와 더불어 새로운 방향(方向)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는 부조리(不條理)의 감정(感情)으로 삶의 규칙을 세운다는 것을 부인(否認)하고 반항(反抗)과 거부적(拒否的)인 태도를 참고 감추어둔다는 것이 오히려 하나의 실증적(實證的)인 요소(要素)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제언(提言)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반항자(反抗)라고 함은 무엇인가?』『「아니」하고 대답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거부(拒否)하면서도 단념(斷念)하지는 아니한다. 그뿐만 아니라 「네」하고 대답하는 사람도 역시(亦是) 그 첫 행동부터 반항자(反抗者)가 될 수 있다.』이 글에 있어서의 「까뮈」의 공로는 무엇보다도 먼저 『나치슴』『파시슴』및 자본주의가 범(犯)한 중대(重大)한 과오(過誤)를 고발(告發)하였다는 것과 혁명적공산주의(革命的共産主義)를 매우 엄격(嚴格)하게 비판(批判)하는데 있어서 그의 동포(同胞)인 「사르트르」보다 더 용감하고 더 영리(怜悧)하다는 점을 표시한데 있다. 그외 그러난 서신(書信)을 통하여 보면 어떤 확실한 정견(定見)이 없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무신론은 성실(誠實)한 사람을 막다른 골목길로 끌고간다는 것을 증명한다.
「까뮤」의 죽음에 즈음하여 우리들은 무신론의 어두움 속에서 빠져 나오려고 허덕이는 동료(同詩代의 사람)들에 대한 보다 날카로운 책임감(責任感)을 느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받았다. 그러기 때문에 천주께서 우리를 심판(審判)하시는 날 다른 사람들에게보다 더 많은 형바침을 우리들에게 요구하실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삐쉴리 신부 저·李太載 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