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좌로 사목을 시작하던 때이니 1940년대 초반이다. 혜화동본당은 서울이면서도 공소가 고양군에 5개、 광주군에 20개가 있었다. 공소순회야 보통 춘ㆍ추판공 두 번이지만 이곳은 「별공소」라해서 세번까지 가는 때가 있었는데 적은 공소는 1박2일、 큰 공소는 3박4일이나 걸렸다.
판공을 떠나기 한 달 전에 날짜를 정하고 찰고 (교리시험) 할 교리의 범위를 알려주면 교우들은 이 배정기(날짜배정)를 받은 날부터 비상이다. 강당에 도배를 하랴、 부근에 풀을 뽑으랴、 화장실 청소하랴、 이불 손질하랴、 교리공부 배우랴 그야말로 야단법석이다. 공소를 방문하는 날이 되면 온 동네가 축제분위기다. 학생들은 모두 결석을 하고 설날처럼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아침부터 신부를 기다린다. 청소년들은 5리 10리 밖까지 마중 나오고 신부를 만나면 땅바닥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한다. 그렇게도 좋은지 벌린 입을 다물지 않는다. 신부는 그들의 발에 걸려 넘어질 지경이다. 이야기꽃을 피우며 공소에 도착하면 모두 함께 강당으로 들어가 감사기도를 올린 후 강복을 주면 교우들은『찬미예수』하고 큰절을 한다. 신부는『아멘』인사를 받고 간단히 이번 판공의 요지를 말하고 주님 은총을 빈다. 이로써 판공은 시작된다.
제일 먼저 교리찰고다. 잘하면 상본도 주고 못하면 꾸지람을 받는…가슴 두근거리는 시간、 아마 나이 40세 이상인 사람은 감회가 깊으리라. 종합적인 교리해설이 끝나면 오후에는 고백성사 시간이다. 시간이 허락되면 가정방문도 실시한다. 그리고 정성어린 저녁을 먹고 난후 전원 한방에 모여 성가ㆍ성경공부ㆍ성인들 이야기로 밤이 깊어도 일어설 줄 모른다.
신부는 먼 길에 피곤해서『이제 그만 돌아들 가시오』하면『조금만 더요 조금만 더요』하고 보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당교우들은 언제나 강론도 듣고 교리도 배우지만 공소교우들이야 이때 아니면 언제 신부 얼굴 볼 기회가 있겠는가. 마냥 소유하고 싶었을 게다.
밤 11시에 억지로 부녀자와 어린이를 보내고 어른들만의 자리、 술상이 벌어진 가운데 대세 부치는 법ㆍ공소예절 규칙 등 여러 가지 필요한 예절을 가르치다 보면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게 된다. 그 당시에는 시계도 귀한 때라 시간 맞추기가 힘들어서 그런지 새벽 4시쯤이면 벌써 밖은 웅성거리는 소리로 단잠이 깨진다.
아침 미사가 끝나면 다음 공소로 떠나야하는데… 더 자야하는데… 큰일이다.
신부와 헤어질 시간이면 교우들은 맞을 때보다 더 큰 슬픔으로 손목을 잡고 놓지를 않는다.
어린애들은 따라오며 엉엉 운다. 할 수 없이 풀밭에 앉아 재미있는 얘기로 달래다가 서둘러 도망치듯 뛴다. 본당에서 지내다보면 자주 그 모습이 떠올라 기회만 있으면 공소를 순회했고、 그럴수록 교우들의 신앙이 뜨거움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박해 속에 신부를 기다렸던 순교자들의 뿌리 깊은 유산이 아니랴!
그 후 공소 없는 명동성당으로 부임하여 본당을 30여개 구역으로 분리、 판공을 치뤘는데 이것이 구역 공소의 시작이었다.
정말 공소교우들은 불쌍하다. 빼빼마른 영양실조 된 어린애에 불과하다.
그런데 요즘은 공소라는 이름조차 잊혀져 가고 있는 것 같다. 대개는 본당의 한 구역으로 속하는 모양이다. 옛날처럼 모두 모여 하는 공소예절도 사라져가고. 어른들은 교통이 좋아져 본당으로 나온다 해도 어린이들은 어찌하랴. 어려서 신부 얼굴 대하면서 신앙이 싹트기 마련인데 신부와 대면도 못해보고 늦게 교리만 배운들 뿌리가 어찌 튼튼하랴. 우리 순교 조상들만큼의 신앙을 바라기는 안개속의 빛만큼 희미하다. 이것이 다 누구 탓이랴. 내 탓이요 내 탓이로소이다.
[노사제의 회고] 수원교구 장금구 신부 7
공소25곳 돌며 사목활동
밤지새며 공소교우들과 이야기꽃 피워
판공성사ㆍ가정방문 실시
발행일1989-12-10 [제1683호,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