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4일 선종한 전 미카엘 신부(60ㆍ메리놀회 인천교구)는 노동자와 농어민 및 장애자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타인에게 내어줘 많은 이들로부터 기억되고 있다.
미국 억만장자의 가계에서 태어난 전 신부는 노를담大 상경대를 졸업한 후 건축자재회사에서 근무하다 신학교에 입학, 59년 사제가 되자마자 6ㆍ25의 전화가 채가시지 않은 강화도 땅을 밟았다.
강화본당 사목을 시작한 전 신부의 눈에는 강화도에서 가장 비참한 생활을 하는 이들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15세 전후의 어린 소년ㆍ소녀공원들이 살인적인 저임금속에서 하루14~15시간 일해야 하는 열악한 노동조건을 보고 JOC(가톨릭노동청년회)를 조직했다.
이 과정에서 아직도 세인의 뇌리에 남아있는 강화도 삼도직물사건(67년)때는 기업주와 권력자들에 맞서 그리스도교 사회정의를 지키려다 권력자로부터 공산주의자ㆍ간첩이라는 망발을 듣기도 했다.
또 생명의 위험까지 받았지만 노동자 권익을 옹호, 마침내는 JOC 전국 지도신부로 10여 년간 노동사목만을 전담했다.
그는 바닷가의 농어촌 본당을 자원해 사목하면서 외원을 얻고 사재를 털어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간척사업과 축산업을 일으켰고 수십 개 섬에 지하수를 개발했다.
또 농기계와 농기구를 구입해주고 농수축산물을 도시로 직거래토록 해 농어민들이 제값을 받도록 배려했다.
또한 의사ㆍ간호사 등 수십 명이 탄 병원선을 운항해 지금도 승봉도 등 5~6개의 섬 주민들은 모두 전 신부를 친아버지처럼 잊지 못하고 있다.
전 신부는 흔한 자가용도 없이 살았고 임종 때 간경화로 인상 극심한 진통 속에서도 냉담한 이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며 찾은 후 자신의 모든 고통을 전교 사업을 위해 봉헌한다고 유언했다.
전 미카엘 신부를 두고 인천교구의 모 한국인 신부는 『예수님이 이 시대 한국 땅에서 사목했으면 전 미카엘 신부같이 하시지 않았을까』라며 전 신부는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 외엔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겼다고 회고했다.
아씨시의 성프란치스꼬 성인의 주위처럼 새들이 모여왔던 전 미카엘 신부의 삶을 곁에서 지켜본 이들은 현재 그의 유고집ㆍ전기 등의 출판계획을 세우고 바쁘게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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