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 생활을 6개월 남겨놓고 우리 7명은 부제품을 받았다. 그때부터 기회만 있으면 사제가 된 후 시작될 보좌생활 얘기가 화제다. 우선 어떤 주임신부 밑에서 일하게 될까를 점쳐보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주임신부와 잘 화합하여 지낼 수 있을까 또 그 시대에 유행되던『주임신부는 시어머니요 보좌는 며느리다』는 말을 어떻게『형제같다』는 말로 바꿔놓을 수 있을까 하는것 등이었다.
주임신부는 보좌를 두고 좀 편해보겠다는 생각이 잠재하고 보좌신부는 나도 곧 주임신부가 될테니 내 계획대로 살아보자는 속셈이 서로의 걸림돌로 은연중 교우들 앞에 마찰로 비춰진 것이 아닌가? 그래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와 같다는 말이 유행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1993년 6월 신품을 받은 나는 혜화동 보좌 신부로 발령을 받았다. 때맞추어 주임신부도 교체, 프랑스인인 성 신부가 주임신부로 임명되어 동시에 부임하여왔는데, 나이는 동갑이요, 품으로는 주임신부인 성신부가 나보다 3년 위였다. 처음에는 걱정이 되었다. 본당사목 경험도 적은데 한국 실정도 잘 모르는 분이 주임신부라고 고집만 부리면 어쩌나! 하고. 그러나 한편 모범적 신부로 일컸던 합덕 백신부아래서 3년 동안 수련을 받은 분이라 다소 안심도 되었다.
본당사목이 시작되었다.
앞으로 보좌생활이 몇 해 일런지 모르지만 평탄한 생활이 엿보였다. 얼마 지나 어떤 아주머니가 성 신부님께 농담을 건넸다. 『신부님은 좋으시겠습니다. 저렇게 든든한 며느리를 얻었으니 말입니다』하자, 성 신부님은 정색을 하며 『우리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아닙니다. 형제입니다. 또다시 그런 말하면 정말 맘 상합니다』그 말에 아주머니는 미안해 어쩔 줄을 몰랐다.
다음 주일 공지사항 시간에 모든 교우들에게 『흔히 주임신부 보좌신부 사이를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비교하는 모양입니다만 그것은 고쳐져야 합니다. 우리 두 신부는 형제입니다. 우리 교우들은 우리를 형제처럼 보아주시고 주임신부 보좌신부라 부르지 말고 성 신부, 장 신부라 부르시오』하고 권고 아닌 명령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성 신부는 말만이 아니라 실제로 형제 같은 분위기를 만들려고 애썼다.
종부 성사(병자성사)를 청하면 먼저 가방을 들고 나선다. 『내가 가도 될 텐데 왜 앞장서 나서시느냐』고 물으면 『보좌를 두는 목적은 주임신부가 혼자서는 다하지 못하는 일을 도우라고 두는 것이니 걱정 말고 이다음 주임신부가 된 후에 담당할 계획이나 세우는데 총력을 기울이시오』라고 말했다. 또 혼인조당 때문에 고심 할 때는 함께 의논하자고 청한다. 잦은 대화를 통하여 내가 배운 것은 너무나 많았다.
성신부와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회합을 갖고 사목방침을 의논하였는데 그것이 보좌시절 뿐 아니라 학장시절, 명동의 도시사목, 그 외 농어촌사목등 사제로서의 생활에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을 지금도 절실히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신학교에서 배울 때도 들어보지 못한 것을 보좌시절 주임신부에게서 부운 것이다. 요점을 따서 몇 가지만 적어볼까 한다.
교우들은 반말을 싫어한다, 장년교육에 힘쓰던 30%의 성과도 얻기 힘들지만 청소년 교육에서는 80%의 성과가 나온다, 사목에는 가정방문이 제일 중요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할 떄는 교적공부를 하면 같은 효과를 바랄 수 있다, 강론은 쉬운 말로 15분이면 족하다, 개인의 과실을 강론 땐 발표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다, 모든 교우들에게 차별을 두지 말라, 신부들이 주교와 화합을 이루지 않으면 교우들도 신부와 화합이 되지 않는다. 등등 지금도 꼭 필요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런 교육을 받고 사목해 오면서 「부처 가운데 토막, 참나무 장작개비, 소방수」등등 별명을 듣기도 하며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50년의 사제생활에 남의 지탄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그때 그 훌륭한 주임신부의 가르침이 원동력이 되었음이 꾸밈없는 나의 고백이다.
[노사제의 회고] 수원교구 장금구 신부 6
혜화동이 첫 부임지
“주임신부 가르침이 사목 원동력돼”
장작개비등 별명얻어
발행일1989-12-03 [제1682호,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