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6월21일로 등극 10돐을 맞은 교황 바오로 6세. 76세의 고령에도 눈빛 하나 흐려지지 않은채 오늘도 세계와 인류를 응시하고 있다. 1963년 6월21일 선임자 고(故) 요한 23세의 뒤를 이어 전세계 6억 가톨릭 신자의 2백63대 지도자로 교황좌에 오른 죠반니 밧티스테 몬티니. 그의 재위 10년은 인류 발전과 세계평화 성취를 향한 끈질긴 집념과 노력의 결정(結晶)으로 그 빛을 더해가고 있다.
전쟁ㆍ혁명ㆍ학원동요ㆍ정치적 유괴, 사회도덕의 문란,「하이잭킹」의 증가, 마약매대의 급증, 신(新) 성령 강림주의의 태동, 달나라 여행 등 외적으로는 온갖 변화와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교회 내부에선 변화를 극히 두려워하는 자들과 변화일변도를 외치는 급진파들의 양면 공격을 한몸에 받으면서 무던히도 부심해온 교황 바오로 6세의 10년.
이같은 상황속에서도 어느 한편에 치우침 없이 자기 나름대로의 노선을 따라 선임자의 현대 적응(아죠르나멘또)정책의 기틀을 더욱 튼튼히 다지는 한편 핵시대 모든 인류의 열망과 필요에 상응하는 교회 건설에 심혈을 쏟아온 그는 진보적이면서도 보수적이며 보수적이면서도 진보적인 즉 양노선을 동시에 섭취, 조정하는 탁월한 지도력의 소지자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교황은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이나 교리ㆍ전례 등엔 진보를 꺼려한 반면 교회내 행정기구ㆍ대(対)타교회 및 공산국가 관계 등엔 진보적 거보를 내디뎠다.
올 6월 들어있은 두 사건은 교황의 보수ㆍ진보의 양면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즉 6월14일 교황의 명령에 따라 예부성성은성청이 공인하지 않은 영성체 기도문 사용을 전면 금지시키는 한편 미사의 핵심이 되는 그와 같은 모든 전례양식의 최종 승인권을 성청이 유보한다고 밝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난 23일 교황은 성청박물관 내에 처음으로 60여 개의 방으로 꾸며진 20세기 미술관을 개장 범종교적인 현대미술을 전시함으로써 예술제의 역사적 사건으로 대호평을 받고있다.
교황이 교회 전통적인 가르침이나 교리 등에 보수적 입장을 취할 때마다 교회 안팎으론 비난의 화살이 쇄도하곤 했다.
실 예로 1967 년6월24일 가톨릭교회의 사제독신을 재강조한 희칙「사제독신」과 이듬해 6월29일 알약을 포함한 모든 인공피임 방법이 신법에위배된다는 교회 가르침을 재확인한 회칙「인간의 생명」등은 교황의 무류성 시비를 일으키게까지 교황권에 직접적인 도전을 받기도 했다.
이에 반해 교회행정의 지방 분권과「로마 꾸리아」(교황중앙 행정기구)의 국제화로 「로마」일방적 통치형태에서 각 지역 교회에 통치권의 범위를 확대시켰으며 이태리출신 성직자들의 독무대가 돼왔던 성청 요직에 비이태리 출신들을 대거동을 한 것 등은 교회사상 큰 진전이 아닐수 없다.
교황은 또한 세계 주교 시노드를 창설, 전세계 주교들의 여론과 의견을 모아 교회 통치에 반영하는 한편 모든 수도단체의 쇄신을 촉구하고 기혼부제의 옛전통을 부활시키기도 했다. 라틴말 전례가 모국어로 바꿔진 것이나 주일미사에서 평신도가 강론ㆍ예절에 참여하는 것도 모두 공의회 이후의 일이다.
제2차「바티깐」공의회 이후의 교회를 이끌어온 주역으로 교황 바오로 6세는 교황이「바티깐」의 포로라는 수세기에 걸친 전통을 깨뜨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사도 성베드로 이후 성지를 방문한 첫교황이었으며 대서양을 건너 미국의 UN본부ㆍ남미ㆍ아프리가ㆍ극동 등지를 처음으로 방문한 교황이기도 하다.
특히 타교파간의 관계개선 내지는 교회일치를 향한 그의 노력은 과거 어느 교황과도 견줄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를 굳혀오고 있다.
1964년「예루살렘」성지순례와 때를 같이하여 이뤄졌던 고 아테나 고라스 1세 총대주교와의 양교 분리후 9백여년만의 해후를 필두로 이듬해엔 전세계 성공회 지도자인 마이를 탬지 대주교와「로마」에서 만나 양교간의 우의를 두텁게 하고 상호일치를 모색키 위한 국제 신학위를 구성 최근 성체성사 교리에 실질적인 합의를 보는 등 괄목할만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
1968년 6월「제네바」의 세계교회 협의회(WCC)를 방문한 교황은 교회일치와 세계평화를 역설한 바 있다.
全아르메니아 수좌 총대주교 카톨리코스 바즈켄 1세와「시스틴」경당서 평화의 인사를 교환 1천5백년간의 단절의 벽을 허물었던 것은 1970년5월의 일이었다.
이듬해 71년에는 시리아정교회 이냐시오 야고보 3세 총대주교가 교황과 대면함으로써 15세기의 두 교파간의 격한 대립을 화해로 이끌기도 했다. 금년 5월에는 교황과 콥트정교회 암바 세누다 3세 총대주교가 15세기만의 역사적 상봉을 이룩함으로써 십수세기간의 단절에 종지부를 찍기도 했다. 이색적으로 지난달 초에는 라오스의 불교 최고승 담마야나 마하테리가 교황을 방문 크리스찬의의 타교파와의 관계개선에 좋은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뭣보다 인류의 공동발전과 세계평화를 위한 굽힐줄 모르는 교황의 열과 성은 단순히 한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범주를 초월한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이었다. 1965년 10월5일 유엔 본부를 방문한 교황은 『전쟁은 종식돼야한다.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전세계에 호소하고 콩고 나이제리아 도미니카공화국 인도 파키스탄 중동 월남 및 북에이레 등 전쟁지역에 하루속히 평화가 도래할 것을 강력히 요청한 바 있다.
정의에 입각한 평화만이 인류와 세계를 위한 진정한 평화라고 강조한 교황은 자신 친히 가난과 질병과 무지로 억눌린 수만 무력자의 대변인으로 발벗고 나섰다. 1967년 3월 자발령 「제민족의 발전」을 통해 교황은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와 무신론적 물질주의 물다세상에 악을 증가시킨다고 개탄하고 강대국들의 약소 및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원조와 공동발전을 누차 호소했다.
교황은 특히 공산국가들과의 문호개방에 과감했다. 즉 교회의 사명이 공산국가들과 담을 쌓고 지낼수 없다는 신념의 강력한 표현이기도 했다. 1964년8월6일 교황으로서 처음 발표한 회칙「하느님의 교회」를 통해 교황은 교회와의 대화에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하지않을것을 분명히했다.
다음해 4월8일 성청내에 비그리스도교국을 설치 대(對)무신론 공산주의자들과의 접촉에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교황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1971년 3월에는 공산국가 원수로서는 최초로 유고의 티토 대통령이 교황을 방문한 것을 선두로 소련의 포드고르니 루마니아의 초세스쿠 수상 등이 교황과 대화를 나누기에 이르렀다. 뿐만아니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대(對)공산국가와의 외교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우리 속담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교황 바오로 6세의 교황 제위 10년 그것은 변화와 변화의 연속이었다. 변화의 소용돌이속에서 10년, 주름살도 더욱 늘어났으리라ㆍ교회 일각에서는 꾸준히 그의 은퇴설이 나도는 가운데서도 교황의 기력은 아직도 왕성하기만 하다.인류와 세계의 구원을 위한 교황의 맥박은 잠시도 쉴새없이 뛰고있는 것이다.<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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