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던 날 해산바라지를 하던 부인이 외친 첫마디가 『신부감이다』였단다. 보통은『고추다』하는 소리가 상식이지만 이「성교촌」에서만은 예외였다.
한 살 두 살 먹음에 따라 어느새 나는 『신부될 놈』으로 바뀌었다. 귀여워도 『신부될 놈』야단을 칠 때도 『신부될 놈』이다. 6세 때 기명제 베드로 신부께서 장연본당으로 부임하시고 가을 판공을 치르시는 동안 여러 아이들을 모아놓고 놀이도 시켜보고 먹을 것도 주시며 말을 건네 보시고는 모든 교우들 앞에서 나를 가르키며 『이놈은 여러분이 잘 지도하면 신부가 될 수 있소. 이제부터는 내 아들이요. 몇 해 후 내가 데려다가 공부시켜 신학교로 보내겠으니 그때까지 여러분이 정성들여 커워주시오』하고 단단히 훈시를 하셨단다. 그런 사실을 나는 기억하지 못하나 후에 공소회장님이 전해 주어 알았을 뿐이다.
차츰 철이 나면서 『신부될 놈』소리는 잦아졌고、어른들의 눈초리는 내게로 집중됨을 깨달았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남의 과일 한 개를 따 먹어도 『신부될 놈이 그런 짓 하면 못 쓴다』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아이들과 어쩌다 싸움을 해도 꾸중의 화살은 내게로만 집중된다. 때로는 어느 집에서 떡이나 맛있는 음식을 하면 꼭 나를 불러 먹이면서 『이 다음 신부가 되면 야단치지 말고 성사 잘 줘야 해』하고 놀리기도 했다.
이렇듯 공소 어른들은 모두가 내 선생이요 지도자요 감시원이었다. 그 시대는 자식을 잘 키우려는 부모는 항상 손에 매를 들고 있어야 하는 때였으니 모두가 무섭기만 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살다보니 육체는 어린 아이인데 마음은 어른스러워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럭저럭 12세까지는 한문을 배웠는데 내 할아버지께서 훈장이시라 상은 한 번도 타보지 못했다.
마을 어른들이 모두 이번 도장원은 금구라고 해도 『훈장의 자식 도장원 주는 법은 없다』고 하시며 상을 아니 주셨다. 나는 울기도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처사라고 수긍이 가지만 그때는 할아버지가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열두 살이 되던 1922년에 본당 신부님의 명령이 하달됐다. 본당으로 와서 학교공부를 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학을 떠나는 것이다. 본당에 도착하여보니 벌써 3년 전부터 와있는 학생이 한명 있었는데、그와 같이 한방을 쓰며 지냈다.
공부하러 왔다기보다는 나를 확인하기 위하여 시험대에 올려놓은 신세였다. 본당 신부님은 당신이 노동으로 성장하신 분이시라 일을 시키시기 시작하는데 「종치기」「제병과 미사초 짓기」「밥상 나르기」「복사」등등 공부보다는 잡일을 더 많이 시키셨다. 놀고 있는 것을 보시면 마당 한 모퉁이를 파라고 했다가 다음 날은 메우라고 하시며 시험을 해보신다.
춘추 판공 때면 복사로 동행、하루 5·6십리씩 걸어서 순회를 하신다. 어린이들을 데리고 노는 일도 시키시면서『이 다음 신부가 되면 이 모든 것이 다 써먹을 때가 있으니 잘 배워두어라. 이것도 공부다』하시며 훈시 하신다.
어느새 별명이 바뀌어 수녀들이 『장래 장 신부』라고 부르기 시작하더니 학교선생ㆍ교우들 모두가 그렇게 부른다. 다만 나를 미워하는 동료ㆍ학생들만이 『신부새끼야』라고 부른다. 이제는 선생ㆍ지도자ㆍ감시원의 수가 몇 십 배로 늘었으니 내 자유는 그만큼 줄어들었다. 춘추 판공 때는 40여 일 동안 학교 공부도 중단하고 다녔으니 시험 때가 되면 걱정이 태산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도와주심인지 아니면 선생님의 보너스 점수 덕인지 성적은 일등 아니면 이등이다.
예비신학생으로의 수련을 끝마치고 16세 때 용산 소신학교에 입학을 했다. 내가 별것도 아닌 어린 시절을 소개하는 것은 성소에 관심을 가진 본당 후배 신부님들과 부모들 그리고 일반 교우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희망 때문이다. 물론 시대가 다른 만큼 교육지도방침도 다를 수 있겠으나 성소계발은 어릴수록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으리란 생각에서….
[노사제의 회고] 수원교구 장금구 신부 4
태어나자 "신부될 놈"으로 낙인
예비신학교서 늘 1ㆍ2등 차지
발행일1989-11-19 [제1680호,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