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6일 안중근(토마스) 의사 의거 62주년을 맞아 가톨릭 신자로서 한국에선 처음으로 항일투쟁에 몸을 바쳐 정의실현을 앞장섰던 안 토마스의 얼을 모신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찾아본다.
민족정기 앙양을 위해 안 의사의 동상은 지금으로부터 8년전 그 당시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협회 주관으로 온 국민의 성금을 모아 김경승 교수가 설계 제작하여 1955년 5월 23일 숭의여고 운동장 협소한 곳에서 제막되었다. 그러나 그 자리가 워낙 비좁고 비탈져 안정된 곳이 못되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치 못한채 불만스럽게 여겨오던중 그때의 기념사업회가 62년에 해체되고 그 이듬해인 63년 4월에 안중근 의사 숭모회(이은상)가 사단법인 발족되면서 안의사 동상을 관리해 오다가 67년 4월 26일 지금의 자리 남산 어린이회관 앞으로 이안식을 갖게되었다. 옮겨진 이 동상은 김경승 교수가 이번에도 설계 및 조각을 담당했다. 통상 뒷배경은 비석 15개를 병풍처럼 늘어 세웠는데 이 비석에 새긴 글은 안 의사의 필적과 유언들을 숭모회 노산 이은상씨가 집필했다. 그 비문들의 내용을 보면 ①「의사의 소회」로 안 의사가 1909년 11월 6일 일본관헌에 제출한 글로 인간의 평등과 생명의 존엄성을 주장하고 아울러 이에 어긋난 일본정책을 힐책한 것과 동시에 이동박문은 동양 전체를 장차 멸망의 길로 인도할 존재로 단정하고 총 한방으로 만인이 보는 눈앞에서 그의 최악을 성토하여 뜻있는 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우겠다는 내용이며 ②는 그의 남아로서의 용기를 잘 표현한「장부가」
③은이동박문을 죽인것은 한국의 군참모 중장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였다고 밝힌「의거이유」. ④는 2천만 형제자매는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여 조국의 독립을 이룩할것을 부탁하는「동포에게 고함」. ⑤는「최후유언」으로 두 아우 정근ㆍ공근과 흥신부에게 남긴 유언들로 돼있다.
또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숭모회 추진으로 1969년 10월 26일 의거 60주년을 맞이하여 각계 인사와 국민의 협조를 얻어 70년 10월26일 준공됐다. 기념관이 위치한 이 자리는 일정때 신사터로 조국의 땅을 얼룩지게 했던 곳으로 민족의 얼인 안 의사의 동상과 기념관을 세워 선열들의 독립투쟁 정신을 아로 새기고 있다.
총건평 1백34평으로 기념관 내부에는 안 의사의 유목 30여 점과 사나이의 용지를 잘표현한 장부가, 흥석구 신부에게 보낸 엽서 등 안 의사의 필적품 5점과 안 의사의 옛집을 비롯해 의거에 사용한 권총, 이동박문 사살장면, 공판정 광경, 옥중에서의 안 의사 모습 등 사진 20여 점이 진열되어있어 그 당시 의사의 일거일동을 역력히 회상할수 있다.
조국이 기울어갈제 분연히 나타난 의사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읍에서 탄생했다. 부친은 성균진사 태훈공이였고 모친은 조마리아 여사였다. 부친 안태훈 진사도 일찍이 천주교리를 익혀 동학혁명 당시 그러니까 안 의사 나이 16세때쯤에 복음을 널리 펴서 해주읍을 비롯한 원근 주민들까지 입교시킨 천주교인이었다.
안 의사도 부친의 영향을 받아 16세 되던 해 프랑스 흥석구 신부 주례로 영세입교했다. 안 의사는 흥 신부와 다니면서 전도사업을 벌였는데 군중 앞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한다. 『형제들이여! 형제들이여! 나에게 할말이 있다 제발 내 말을 들어보소. 만약 한사람이 혼자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이것을 가족에게 고루 나누어주지 않는다거나 재주를 간직하고도 남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이것을 가히 동포의 정리라 할 수 있겠는가. -중략-
비롯이 없고 끝이 없고 삼위일체(성부와 성자와 성신이니 그 뜻은 깊고 커서 아직도 깨닫지 못했음) 전농(全能) 전화(全和) 전선(全善) 지공(至公) 지의(至義) 천지 만물 일월성신한 것을 상주거나 벌줄수있는 오직 하나요 둘이 아닌 대주재자(大主宰者)가 바로이이오』-중략-
(안중근 의사 자서전에서)
또한 그는 일찍이 나라를 흉하게 하는 방법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실업을 장려해야 된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민 주교에게 한국 천주교 장래를 위해 천주교인을 위한 학교설립을 권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부친을 여의고 진남포로 이사한 후 재산을 기울여「돈의 학교」를 설립, 구국(救國) 인재를 양성했고 애국지사의 강연회를 통해 민심계통에 전력을 다하다가 가슴에 꿇는 피를 누를 길 없어 29세때 해삼위로 나가 대한의군 참모 중장 겸 특파 독립대장 등의 이름을 띠고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중 1909년 10월 26일 의사나이 31세에 의거를 행한 것이다. 이등박문을 저격한 후『코리아 후라』를 몇번이나 외친 다음『신이여! 포악한 자를 무찌르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하며 유쾌히 웃으면서 노국헌병에게 대현히 포박당했다 한다. 위의 의사의 두 필적을 통해 우리는 의사의 투철한 민족정신과 세계 평화주의 사상을 충분히 엿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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