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바오로 6세는 「성베드로」대 성정에서 꼰벤뚜알 성프란치스꼬회 일본관구(東村山市) 설립자(폴란드人) 막씨밀리아노 M. 꼴베 신부(1894년~1941년)의 시복식을 거행했다.
일본의 그리스도교 금지시대, 하느님의 사랑을 입증키 위해 외국인 선교사를 포함한 26명이 순교했다. 이들이 성인품에 올려진후「江戶」에서도 순교자를 내고 그 중 3명이 복자품에 올랐는데 일본교회로서는 그 후 오래간만에 듣는 기쁜소식이다.
활동과 희생의 선교사 꼴베 신부는 1930년부터 36년까지 6년간 일본서 포교하면서 교육 및 수도회의 기초를 이룩했다. 또한 성모께 대한 열렬한 신심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돼 꼴베 신부는 수사들과「암테츠」수용소로 보내졌다가 3개월후 수도원에 되돌려 보내졌다.
그러나 1941년 또 다시 체포되어 그 해 5월「아우슈빗쯔」집단수용소에 보내졌다. 포로의 한사람이 도망했을때 연대책임이라고 하여 10명의 포로에게 아사형이 언도됐다. 이때 꼴베 신부는 가에프스키라고 하는 처자 있는 사람의 대신이 되어 자진하여 사형을 받았다. 성모승천축일 전일인 8월 14일 독살주사를 받고 숨졌다. 이때 나이 47세.
꼴베 신부는 12세때 꼰베뚜알 성프란치스꼬회에 돌아가 17세때 이미 수도서원을 발했다. 「로마」에서 수학, 1918년 4월 28일 신품을 받고 귀국했다. 고국에서는 결핵병으로 요양소 생활을 하면서「무염성모의 기사」라는 잡지를 출판했다. 잡지는 곧 7만부로 늘었으나 거액의 빚을 지게되었다. 그가 무염성모께 기도하려고 성당으로 달려가니 꼭 그 빚을 갚을만큼의 애긍 주머니가 제단에 놓여있었다 한다.
꼴베 신부는 또한「무염성모의 마을」을 건설하려고 넓은 땅을 빌려 무염성모성상을 그곳에 세우고 인쇄소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땅값을 내지못해 그 터를 내놓게 됐을때 성모상만을 그대로 두어달라고 땅주인에게 간청했다.
성모께 대한 신심에 감탄한 땅주인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 넓은 땅을 희사했다. 그리하여 최신설비를 갖춘 인쇄소를 설치하고「무염 성모의 기사」잡지를 발행, 1백만부를 돌파하면서 각지에 보급했다.
꼴베 신부는 이러한 마을을 다른 나라에도 건설하려고 4명의 회원을 동반하고 일본「나가사끼」에 이르러 상기 잡지를 1만부씩 출판하고 몇 해 안되어 수도원 성당 고아원 공장 발전소 예비자 교육을 위한 강당, 신학교까지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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