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3일은 50여 년 동안 예수의 다섯 상처를 그대로 받고 사셨던 삐오 신부님의 기일이다. 1968년 9월23일 선종하신 삐오 신부님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돌아가신지 21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신부님의 정신을 따르는 기도모임도 생겨났으며, 이태리 폿지아에는 삐오 신부님의 뜻을 기리는 병원이 설립됐다.
본명이 프란치스꼬 포르지오네였던 삐오 신부님은 이태리정부가 각 학교에 십자가 철거령을 내렸던 1887년 5월25일 베네벤트 근처마을 한 소농의 집에서 8자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어떤 희생도 감수
프란치스꼬는 이미 다섯 살이 되면서 부모님에게 수도원에 들어갈 뜻을 비쳤다고 한다. 부모들은 이러한 프란치스꼬의 성소를 존중하고 빌어주셨다. 당시 프란치스꼬의 아버지는 미국으로 건너가 일하며 아이들의 양육비를 부쳐주고 있었다. 15세 되던 해인 1903년 프란치스꼬는 프란치스꼬의 수도원에 들어갔고 1910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삐오 신부님은 후에 당시의 수도생활을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이었다고 했다. 삐오 신부님에게는 그라 그토록 열렬히 사랑했던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크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하느님의 계명과 수도원 규칙을 준수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최소한의 생활이었다.
그래서 그는 더 많은 희생을 찾아내고 실행하고자 했다. 주위의 사람들이 하느님과 일치의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자신이 그들을 대신하여 모든 고통을 다 받겠노라고 청원했다. 이러한 신부님의 뜻은 곧 신부님이 마음을 비우고 사셨다는 것을 말해준다. 주님은 그 빈곳에 당신의 은총을 가득히 부어 주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력같은 예수성혼
삐오 신부님은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초자연적 은혜를 받았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꿰뚫고, 병을 고치고 예언을 했다. 또 동시에 두 곳에서 현존하셨고 텔레파시나 언어의 기적 등를 행하셨다. 삐오 신부님께 나타났던 이러한 초자연적 은혜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다섯 성혼이다.
그리스도의 성혼은 처음 얼마동안 숨겨졌으나 1918년 9월 20일 이후부터 사람들에게 보여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깝고 먼 여러 지역에서 많은 순례단이 찾아들었다. 폿지아 산지오반니 로쫀도에 있는 수도원으로.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말씀대로 삐오 신부님은 진정한 사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기 자신의 성화로서, 특히 고백소에서는 영혼들로 성화를 위해 몸을 바쳤다. 신부님은 정직하게 사랑으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을 하느님과 함께하는 일치의 길로 인도하였다. 하지만 하느님 법을 경솔하게 어기는 자에게는 가차없이 엄격함을 보여주었다. 신부님의 엄격함은 오늘날 인류가 범하는 모든 잘못의 근원이 하느님법을 지키지 않음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신부님의 계속적 도움을 받으려면 항상 회개한 마음자세를 가져야 했다. 신부님은 자주 『여러분은 자신의 죄를 저울질 하지 말라. 그것이 무거운 것이든 가벼운 것이든.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에는 모든 것이 어렵고 무거운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교황말씀 성실히 따라
삐오 신부님은 대단한 충성으로 교황의 가르침을 따랐다.
교황 레오13세께서 묵주기도를 추천하자 삐오 신부님은 밤낮으로 묵조기도를 하였고, 자신의 영적자녀들에게도 묵주기도 할 것을 권했다.
교황 삐오10세는 모든 수도자에게 「하느님께 희생을 바치도록」요청했으며, 사제들에게 『사제는 탓할 수 없는 윤리로 살아야하며 사제안의 하느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어야하고 덕행에 있어서 다른 신자들보다 뛰어나야 한다』고 당부하셨다(1904년). 삐오 신부는 이 호소를 글자 그대로 몸소 실천했다.
또한 삐오12세 교황이 기도모임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자 신부님은 즉시 자신의 영적자녀들에게 기도모임을 주선하셨고, 자신도 자주 참석할 것을 약속했다. 이 기도 모임은 지금 전세계에 조직되어 있다.
큰 인류애의 증거들
신부님 일생의 중심은 성체성사, 즉 그리스도 십자가의 희생제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분 자신이 말한 대로 신부님은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다. 매일 미사참례 할 것과 경건하게 성체 모실 것을 권유하였고 그리스도와 일치한 사도적 신자로 살도록 요청했다. 삐오 신부님은 또 모든 영혼들의 눈물을 닦아 주려고 했다. 이러한 크나큰 인류애를 나타내주는 증거중의 하나는 병원설립이었다. 그를 따르는 사라들의 도움으로 「까사 솔리에보」라는 병원을 세웠다. 「까사 솔리에보」란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집」이란 뜻이다. 이 병원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무료 치료연구소와 기도모임센터도 갖추고 있다.
수사신부로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았던 삐오 신부님은 50년 동안이나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 즉 성혼의 십자가를 지니고 살았다. 이로써 그는 그리스도의 고통의 순간을 일생동안 참으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온세계에서 모여들었고 후에 그의 장례식에는 수십만 명이 참석했다.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은 그분이 죽기 전 남기신『나는 천국에서 여러분을 위해 훨씬 더 많은 것을 해줄 수 있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감동에 젖었다.
사실상 삐오 신부님이 행한 기적이야기는 심심찮게 흘러나오고 있다. 그중 시실리섬의 장님 젬마 디지오르지를 눈뜨게 한 기적은 그분을 다시 존경케 해준다.
온세계 기도 모임들
삐오 신부님은 교황 삐오12세의 호소에 따라 기도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의 처음 시작은 1947년 이었으며 현재 7만 명의 회원을 갖고 있다.
그는 살아있을 때 매일 아침 피 흐르는 손으로 드리는 미사 중 하느님께 올리는 성작이 세계 모든 신자들의 기도를 한곳으로 모으길 기원했다. 그리스도의 제물과 일치한 기도는 상상할 수 없는 큰 힘을 가진 것이었다.
교황 요한바오로2세는 1987년 삐오 신부님의 백세생일에 무덤을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현 교황이 젊은 보좌신부였을 때(1947) 삐오 신부님을 찾아간 적이 있는데, 그때 삐오 신부님은『당신은 교황이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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