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ㆍ광주】 병세가 점차 호전되어 간다는 소식에 뒤이어 7일 오전 전해진 한 대주교의 부음은 참으로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1월30일 오후 9시경 빈사상태로 병원에 도착한 韓 대주교를 가까스로 회생시킨 병원 측은 2주일간 일체 면회를 금지시킨채 병세를 주시해오다 2주가 지나서야 2월 말경이면 일단 안심할수 있을것 같다는 지극히 조심스런 발표를 할만큼 병세가 위독했었다.
그 후 2주를 고비로 병세는 차차 호전되어가기 시작, 김 추기경 등 극히 제한된 몇사람에게만 간단한 면회가 허락됐다. 지난 2월17일 기자가 방문했을때 한 대주교는 자기를 염려해주는 광주교구 성직자 평신도들에게 감사를 전해달라는 말을 간신히 할 정도였다.
3주째 접어들며서부터는 간호원의 부축을 받아 침대를 내려설수 있었고 운명 2~3일 전부터는 혼자 침대에 내려와 식사도 하고 세면도 할 정도였다.
이날 아침 8시경 간호과장 김 아다가 수녀가 병실을 찾았을때만 해도 『매우 기분이 좋다』면서 밝은 표정이었다고. 이날따라 입지않던 실내 가운을 꺼내 입고 있는 것을 본 김 수녀가 『주교님 그 옷 꺼내시는데 힘드셨을텐데 힘든 일을 하시면 위험하니 앞으로 간호원을 불러 시키십시오』하고 주의(?)를 주자 『요즈음은 식사도 세면도 내 손으로 하는데』하면서 웃기까지 했다고 김 수녀가 전했다.
그런지 불과 한시간 후인 9시10분 경부터 갑자기 심장의 고동이 불규칙 해지면서 눈빛이 흐려지자 주치의 김학중 민병기 박사 등 전 스탭이 동원, 인공호흡을 시켰으나 병세는 이미 기울어져 35일간의 투명생활도 헛되이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10시30분 운명했다.
위급하다는 병원의 연락을 받고온 김 추기경 병원장 유수철 신부 부주교 김철규 신부가 임종을 지켜봤고 한 대주교 형님 한장열(66)옹이 운명전 도착했으나 동생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한채 복도에서 흐느끼고 있었고 형수 이정순(64) 여사는 『환갑을 사흘 앞두고 입원하시더니 면회한번 못한채 돌아가셨다』고 목이 메었다.
운명후 오전 11시경 유해는 곧 명동성당 지하성당에 옮겨져 안치됐고 부음을 듣고 온 신부 수녀 평신도들이 잠들듯 누워있는 한국인 대주교의 첫죽음을 지켜보며 평생을 목자로서 살다간 고인의 평안을 기도했다.
첫 연미사는 오후 5시 김 추기경 집전으로 봉헌됐고 이 미사에는 서울시내 신부 40여 명을 비롯, 4백여 명이 참례 『너희는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주의말씀을 되새기는 사순절 첫아침에 흙으로 돌아간 한 영혼을 추모했다.
유해는 명동지하 성당에서 하룻밤을 지낸후 7일 오후 4시 급히 상경한 광주대교구 김정용 부주교와 이영수 상서국장 신부에게 이날 밤 입관된 후 8일 오전 8시30분 성모병원 앰브란스에 실려 광주로 향했다.
유해는 오후 3시30분 빈소인 호남동성당에 도착, 그를 따르던 양들과 비록 유명을 달리했지만 인사를 나누게 하려는 장례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개관된 채 안치됐다.
유해 주위에는 김 추기경을 비롯, 김재식 전남지사 남상집 광주시장 국회의원 송호림 김녹영씨와 수도단체 사회단체에서 보낸 조화 30여 개가 놓여있었다.
이어 오후 7시30분부터 부주교 김정용 신부와 장옥석 신부 집전 연미사가 계속 봉헌되있으며 8일 오후 3시부터 9일 오후 1시까지 광주시내 10개 본당 신자들이 20개 조로 나뉘어 유해를 지키며 연도를 바쳤다.
유해는 검정옷칠한 한치두께관안에 주교복에 싸여 누워있었고 목자 잃은 슬픔에 잠긴 신자들은 눈물을 닦으면서 관장에 놓인 문장과 목장(牧杖)을 쓰다듬는 모습도 보였다.
12시30분 장례식에 앞서 관은 다시 덮히고 검은 유해포가 그 위에 씌워졌다. 오후 2시 목자의 마지막 길을 보려는 2천여 명의 신부ㆍ수도자 평신도가 5백여 명 수용 성당 안팍을 메운 가운데 주교단 집전 고별미사를 시작으로 장례식에 들어갔다.
씨튼 까리따스 수녀회 합창단이 부르는 「사랑의 노래」가 고통을 넘어선 목자의 마음을 노래하는 듯한 가운데 엄수된 미사에서 김 추기경은 『우리가 마련한 고통이 칼날에 뚫려 드디어 그의 마음 심장은 파열되고 말았다』고 말할때 성당안은 물을 끼엊은듯 조용했고 영결식중 『나는 전임 현 대주교님께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말이 없다.
이 감사함에 보답키 위해 우리도 외국 선교사들과 같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지방에 선교사를 보낼수 있도록 교구의 자립에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총동원 협력하여 이 소망을 이루자』는 교구장 취임사(71년 7월14일)가 녹음으로 재생되자 흐느끼는 소리가 간간히 들리기도 했다.
노기남 대주교는 주교단을 대표한 조사에서 『나같이 나이많은 사람이 먼저 죽어야할것을 이제한창일한 나이에 한대주교가먼저 돌아가셨다』고 애도하면서 그의 유업을 교구 성직자 평신도들이 이어주길 당부했다.
영결식을 끝낸후 십자가를 선두로 운상행렬에 나선 유해는 앞뒤로 주교단과 신부단의 호상을 받으며 시가지 약3키로를 도보로 행렬하는 동안시민들은 그들이 가끔 대화를 나누었고 친근했던 한 지도자의 죽음에 조의를 표의하는 모습이 보였고 행렬에 참가하지 못하고 연도에 모여 연도를 바치는 신자들 가운데는 미사보를 쓴 여인의 모습도 보였다.
행렬은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지어 약 4백미터에 달했고 여교우들 약 5백명은 소복차림으로 행렬을 따랐다
행렬은 중심가를 벗어나 광주 시민공원 광장에 도착 일단 해산한 후 6대의 버스에 분승, 묘지로 향했다.
하관에 절을 마치고 형 한장렬(66)옹이 울먹이며 마지막 성수를 뿌리고 관 위에 흙이 덮이기 시작한 때가 오후 5시25분, 운상행렬에 나설때 잠시 뿌리다가 멈추었던 비가 다시 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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