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번역은 천주교회에서는 특히 중요시하였다. 온세계에 하나인 가톨릭교회를 이렇게 하나로 보존하여 하느님 계시 따라 키워나가기 위한 노력이 정확하고 틀림없는 번역을 요구하는 것이다.
내 영혼이 오로지 향하고 있는 지존하신 분, 2인칭 중의 2인칭, 대월한 이분을 가장 존경스러운 말로 표현코자 선비들과 선교사들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 그리고 여러모로 고찰을 다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너」를 썼던 것이다. 이 시대의 천주교의 경문이나 성경이 품격 높은 명문이었음은 그 번역자들의 지성적 수준으로 보아도 그럴 일이고 최근에 와서 개신교의 장로이신 전택부씨가 개신교의 성격번역문과 비교하여 우리 성경직해가 우수한 글임을 증언한바 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시대에 분명한 2인칭 토씨로는「너」밖에 없었던 것으로 본다.
그 후 시대가 내려오면서 인칭대명사가 필요하게 되고 여러 번 씀으로써「당신」「그대「자네」등이 2인칭 성을 띤 것으로 본다. 이 천주경 기도문은 일제 때를 거치고 해방 후 1960년대까지 계속됐었다.
1960년대 말에 6ㆍ25의 상처도 아물어 갈 무렵, 문화가 차차 열매를 맺고 특히 언어학도 상당한 진보를 보였었다. 또 1962년부터 65년까지 계속된 공의회는 교회를 쇄신하고 또한 세계를 전환시켰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도 공의회의 정신에 맞춰 교회쇄신의 큰 걸음을 걸었다. 이 때 모든 기도문과 전례문을 새로 짓고 또는 수정하였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 나라가 임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여기서는 2인칭 자리에 본명사를 썼다. 셋째 줄의 지시대명사「그」도「아버지의 나라가」이렇게 했다면 어느 면에서는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어떻든 낱말 쪽을 더 의식했던 옛 번역보다 훨씬 좋고 우리말의 자연스런 리듬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된 셈이다.
새 전례문도 2인칭이 자연스럽게「당신」아닌「주」「주님」「하느님」등이어서 좋다고 본다.
3인칭에서는 「당신」이 2인칭에서와 같이 복잡 미묘한 사정은 없고 언제나 재귀대명사적으로 존경을 표시한다. 「이」「그」「저」는 말하는 이의 거리의식에 따라 쓰이며「이」는 비교적 적게 쓰이고 글말에는「그」가, 입말에는「저」가 많이 쓰이며 이 세 말들은 각각 그 복수형을 가지되, 일반적인 복수 접미사「들」을 붙여 만들고 있고「저」만큼은 그 위에 더「저희」를 가진다. 이는「저희」가 2인칭「너희」와 나란히 3인칭 중의 대표적 3인칭이라는 인상을 준다. 미사 전례문 시안에는 3인칭이 별로 없어서 3인칭 자체로서는 문제될 점이 없다고 본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3인칭「저」「저희」가 1인칭에 빌려 쓰이고 1인칭의 정통명사를 밀어내 버리는데 있다. 그것도 미사 전례문 온통 수백 번인지 수천 번인지 발언하게 되고 입에 익어버리게 되는 것이 큰 문제라고 본다. 1인칭의 약화는 물론, 1인칭과 3인칭과의 혼동 또한 불행한 일이다.
이러한 폐단은 미사전례문의 주인공인 천주교에만 주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2백만 넘는 신자들의 입에서, 주일마다, 또는 평일에 그리고 수백의 본당에서 수없이 발음돼 나와 나라 안에 번지고 우리말에 영향을 줄 것이다. 광복 후 겨우 제자리를 찾은 우리말은 나라의 번영과 문화의 발전과 마음의 행복을 향하여 제대로 걸어온 역사가 얕다.
훌륭한 글자는 가졌으나 훌륭한 문헌은 모두 한자에 감추어 있다. 우리의 오늘날의 복잡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현시점은 인간의 가치관의 정립과 사회의 정직성 되찾기와 협동의 즐거움을 체험케 하는 일이겠다. 이 활동 속에서 쏟아지는 생각들이 말 되어 나올 것인즉 말의 풍부해짐과 아울러 말의 과학성을 지향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사색과 연구와 명상, 기도, 설명, 논설, 논문, 교류, 교육…. 삶의 현장에서 말의 과학성이 건강한 사회건설을 뒷받침할 것이므로 우리는 미사전례문에서 1인칭과 3인칭을 흐리게 하는 일이 없어야 마땅한 일로 본다.
다음은 존경의「님」을 붙이는 문제가 되겠다. 흠숭하올 하느님께 얼마나 경어를 붙여도 넉넉하겠는가? 또 붙인다면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이는 주님의 말씀입니다」하였다면「주여」에도「주님이시여」이렇게 돼야 할 것이다. 「성부의 아드님이여」는「성부님의 아드님이여」로 해야 하지 않을까? 몇 가지 예만 들었지만 수 없이 많은 케이스가 있다
「하느님」이란 말은 존경의「님」까지가 한 단어이다. 이는 우리말 중에서도 아주 멋진 말이라 하겠다.
「이는 주의 말씀입니다」
「성부의 아들이여」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여」하는 것이 오히려 부속품들에게 가리워지지 않은 본질에 단번에 뛰어오르는 느낌이 아닐런지.
「교황」과「성신」을 종전처럼 그대로 하자는 의견이 나와 있다. 같은 생각이다.
「또한 사제와 함께」를「성령과 함께」로 굳이 성령을 돋아 세우는 이유는 무엇인지?
「참회」의 단계에서 죄를 거기서 고백한다는 것인지? 성찰하는 것으로 그쳐야 마땅하지 않을까?
감사기도에서「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를「옳고 마땅한 일입니다」로 고쳤는데 순서에 무슨 뜻이 있는지?
「공번되다」를「보편적」으로 고쳤는데 이 말은 우리가 2백여 년 동안 써 오면서 천주교적, 만민에게 다 미치는 평등과 사랑, 하느님의 자녀, 그런 의미 붙음이 있다. 새로 입문한 교우들에게 좀 어색할지 모르나 그들이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에 「보편적」이란 뜻보다 훨씬 더한 그 무엇을 깨닫는 게 아닐까?
「음복」이란 유교예절의 말을 굳이 가져와야만 토착화가 될까. 2백여 년 동안 한국인이 써온 말, 그리고 충분히 내면화된 「성찬」. 이 말은 토착화된 말이 아닐까?
「사흘날」은 신경 속에 있는 말인데「사흩날」이 맞다. 아마 활자의 오식인지도 모르겠다.
저의 정성을 다하는 뜻에서 이 글을 올립니다.
[미사통상문 개정안 의견서] 샬트르 성 바오로수녀회 정의순 수녀 (하)
「교황」「성신」「공번되다」는 그대로 사용을
「음복」보다 「성찬」이 더 내면화된 토착어
발행일1989-07-02 [제1662호,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