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새 봄을 맞은 전국의 수많은 어린이들의 동심(童心)을 꽃피워 주는 동요「개나리」의 작곡가이자 한국 현대음악의 선구자 권태호(프란치스꼬) 선생이 2월 29일 경북 안동군 예안면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년 70세를 일기로 쓸쓸히 숨져갔다.
권 옹은 일제 치하에서「도꾜」음악학원, 우에노 음악학원을 수료한 후 가난에 쫓기면서도『음악 하나만을 위해 죽겠다』던 지조를 끝내 굽히지 않은 채 온 생애를 음악을 위해 바치고 갔다.
해방 후 일본에서 귀국한 권 옹은 한때 서울에서 교편을 잡다 고향 대구에서 후진 양성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한때 비산동 셋집에서 음악학원을 열고 후진들을 지도한 적도 있었으나 얼마 안 가 자금 사정으로 문을 닫아야 했다. 그 후 보따리 하나만을 싸들고 남의 셋방을 전전하기 10여회를 거듭하면서도 그의 불 같은 정열은 꺼질 줄을 몰랐다.
한때 주위의 도움으로 음악학원 설립의 꿈이 실현될 듯하다 역시 자금 사정으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권 옹은 울적한 마음을 풀기 위해 술과담배를 가까이하기 시작했다. 술과 담배로 울분을 달래며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서도 음악에의 집념은 버리지 못해 경주극장에서 여러 차례 독창회를 갖기도 했고 아끼던 제자 현규진(토마) 씨와 손잡고 1957년 국민가요 보급회를 조직, 중고등학생들에게 건전가요 보급에 열중하기도 했다.
故 안익태 선생과 동기동창인 권 옹은 그의 짙은 민족주의적 경향으로 일본 악단에서 활약하면서도 항상 일경(日警)의 감시를 받아 왔다. 이 결과 안익태 선생과 같이 신청한 여권이 그에게는 발급되지 않아 유럽 유학의 꿈은 깨어지고 말았다.
그의 이러한 민족주의적 색채는 작품 경향에서도 뚜렷이 나타나 독일 가곡을 전공한 권 옹이 민속 고유의 음악에 바탕을 둔 민요조의 가곡을 작곡했다. 그가 대구 시민들을 위해 바친「능금노래」에서 이러한 경향이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6ㆍ25 동란 때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피를 흘릴 때는「승공의 노래」를 작곡, 온 국민의 사기를 높여 주기도 했다. 작고하기 직전까지 지병(持病)인 중풍과 싸워 가며 생일ㆍ회갑ㆍ돌 그리고 민속 고유의 명절 노래들을 작곡해 보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 공보원에서 가진 은퇴 공연에서는「하이 테너」이던 그가 노구로 고음 부분이 막힐 적마다 옛날의 능숙하던 그 제스쳐만으로 이 부분을 넘기고 끝까지 공연을 마쳐 온 장내를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문화인들 사이에서는 온 생애를 음악에 바쳐온 문화인을 이토록 홀대, 비참하게 만들 수가 있느냐는 비난의 소리가 비등하기도 했다.
한때 경향 각지에서 호평을 받은 영화「와룡선생 상경기」의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한 권 옹은 그의 주변에 숱한 일화를 남겼다. 지독한 애주가이던 그가 거쳐간 곳곳에는 그의 풍부한 인간미와 유모어가 점철된 일화가 남아 있다. 평소「백조」와 막걸리만을 애용하던 서민적인 권 옹은 제자들의 도움도 항상 부담으로 느껴 제자들이 애써 편히 모셔 보려고 노력도 했으나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를 못했다.
故 김익진 선생과는 다른 교분을 맺어 김 선생과 박수상 씨의 권고로 64년 대구 까르멜성당에서 차매우 신부로부터 영세, 입교한 권 옹은 교회음악 개척에도 한때 정열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른 봄 경주 황오리 미나리밭을 지나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미나리 싹을 보고 젊은 시절 푸른 잔디에 누워 맑고 높은 음성으로 한껏 노래 부르던 옛날을 회상타 자신도 모르게 도취되어 미나리 밭으로 뛰어들어 흙탕물에 누운 채「메기의 추억」을 쉰 목소리로 불러 길 가던 시민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던 권 옹-평생토록 음악을 사랑하며 음악과 함께 살고 간 그는 묘소에 돋아나는 새싹들을 베게 삼아 지금도 그의 애창곡을 소리 높여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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