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사형수들의 대부(代父)로 불리워온 교도관 고중렬(베네딕또) 씨가 11일자로 20년 간 몸담아온 구치소를 떠났다.
고 씨는 황해도 송화군 성교촌 태생으로 지난 51년에 월남, 교도관학교(前 형무관학교) 제1기를 수료한 후 군산교도소를 거쳐 55년부터 서대문 구치소에 근무하게 됐다.
당시는 전쟁 직후라 사형 집행이 빈번했는데 그때마다 고 씨는『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지만 저렇게 허무하게 죽어야만 하는가?』고 회의를 품기 시작, 덧없이 가버리는 영혼들을 구하기로 결심케 되었다.
그때부터 고 씨는 형이 집행될 때마다 현장에 달려가 대세를 주었고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과 만나 영세하기를 권했다.
고 씨는 처음에는 운동 담당관이어서 사도직 활동에 제한을 받아 왔었으나 사방담당관으로 옮기게 되면서 3, 4백 명의 사형수를 대상으로 활동케 되었다.
그러던 중 58년경부터 故 김흥섭 판사와 윤형중 신부 및 박귀훈 신부가 구치소에 왕래하면서 더욱 용기를 얻게 되었다. 사방담당이면서 교리를 가르친 후 교무과와 연락하여 영세를 시키곤 하던 고 씨는 교무과 김현우(現 청주 교무과장) 씨와 친밀하게 되어 그와 윤형중 신부의 주선으로 60년에는 교무과로 전임하면서부터 오로지 영혼 구령에 전심전력해 왔다.
교무과에서 차입 서적 검열관로 근무하면서 수시로 하루에 한 번씩은 온 사방을 두루 살피게 되어 수감자들과 자연히 친밀한 유대를 갖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고 씨는 그리스도적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부자유스런 수감자들에게 불편한 일들을 보살피는 데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았다.
엽서를 사 주거나 그들의 정당한 신변 보호를 위해 변호사들을 소개해 준다든가, 박봉을 털어 사식을 마련해 주는 등등...
순간적 잘못으로 내버려진 수인들의 아버지가 되고 형님이 됨으로써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의 증인으로 활약했다. 51년부터 현재까지 고 씨를 통해 영세 입교한 수감자는 무려 6백50명, 이 중에 사형수는 1백여 명인데 이들 모두가 고 씨를 대부로 삼고 있다. 20년 간의 대부생활에는 잊지 못할 추억들도 많다. 대자인 3대 독자가 사형된 후 그 집안 식구들이 오빠라고 부르고 아직도 집안 간에 왕래가 있으며 종로성당의 여교우를 펜팔로 소개하여 지금은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이들 역시 고 씨를 친아버지처럼 받들고 고 씨는 이들의 부부 싸움에도 끼어들어 화해시켜 주기도 했단다. 인정과 인정이 이어져 가난한 살림에도 밝은 웃음을 꽃피우던 20년 간의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고 씨는『성직자들은 구내 통제가 심하지 않으므로 신부나 수녀들의 적극적 지원이 아쉽다』고 안타까와한다.
『우리나라 수감자들의 대우는 많이 교정됐고 그 명칭도 감옥소~형무소~교도소로 개칭되었으나 시설과 대우 면에선 거의 옛날 그대로』라면서 시급한 개선을 아쉬워한다. 이젠 구치소를 떠나면 병마에 시달리는 불우한 환자들과 생활하고 싶다는 고 씨는『이 목숨 다하여 불우한 형제들의 아버지가 되고』싶단다. 부인 임옥봉(일마ㆍ44) 여사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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