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한국은 저의 제2의 고향입니다. 이 땅에서 살다 여기서 묻히는 것이 저의 최대의 소망이었으나 부득이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음만은 언제까지나 한국의 여러 형제들과 같이 살아갈 것입니다.』─ 지난 59년 9월 한국에 첫발을 디딘 이래 13년 간에 걸친 한국에서의 사목생활을 회고하며 말 끝을 흐렸다.
위 신부는 만주사변이 일어났던 해인 31년 9월 만주 봉천에서 출생, 북경에서 소신학교를 마치고 공산당에 쫓겨 대만으로 피난 59년 7월 4일「홍콩」종합신학대학을 수료, 사제로 서품했다.
서품 2개월 만에 위 신부는 당시 주한 교황 사절 람베르띠니 주교의 초청을 받고 중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한국 땅에서 사목생활의 첫 발을 내디뎠다.
입국 직후 서울교구에서 평양교구 신우회 집을 빌어 1년 반 동안 화교들을 사목해 오다 인천에서 6개월 간 한국어 교육을 받고 즉시 대구로 내려와 대구 지방 화교들의 영신 지도에 열과 성을 다 바쳐 왔다.
위 신부의 밤낮을 잊은 노력의 결과 부임 당시 1명에 불과하던 화교 신자가 현재 1백56명으로 늘어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위 신부는 대구 신부들의 모임인 요셉회 회원으로 활약하면서 한ㆍ중 양국 간의 우호 증진에도 크게 이바지해 왔다.
10여 년 간 한국에서 생활하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한국 국민들과 깊은 정이 들어 버렸다는 위 신부는『한국 신자들의 신앙심은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에 비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런 한국 국민들과 헤어짐을 더욱 가슴 아파했다.
『그간 화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주위에서 이것을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 때는 정말 괴로웠으나 요셉회 신부들과 같이한 형제로서 손잡고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영원토록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지난 10년 간을 회고했다.
된장찌개와 김치를 즐겨 먹을 정도로 한국 풍습에 젖어버린 위 신부는『그간 저를 도와 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곳 사정만 허락한다면 3ㆍ4년 내에 다시 한국을 찾을 작정입니다』란 말을 남긴 채 총총이 귀국의 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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