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 찔찔이 개구장이 놈이 엄마 손을 잡고 성당엘 갔다. 꿇어 앉아 미사에 참여한다기보다 지루하고 쫌이 쑤셔 가만이 앉아 있질 못하겠다. 미사가 끝나고 살았다는 듯이 마당에 나왔을 때 본당 신부가『너 커서 신부 안 될래?』하고 친절히 쓰다듬어 주며 말을 건넸다.
<신부, 신부> 검은 옷을 중국 사람처럼 길게 입고『착하게 살자. 남을 도와 주며 살라. 욕심 부리지 말라. 세상은 허무한 것이다』등등 말씀을 하시며 항상 혼자 있다. 그래서 신부는 우리와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신학교에 어려운 철학 신학을 배우며『나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해야겠다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하고 다짐도 많이 했다. 신부가 되고 소임을 맡았다. 이것이 내 일이다 하고 침식을 잃고 일을 했다.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지 그것이 마치 천부적인 필생의 사업인 양 천년만년 그곳에 살 듯이.
그러나 이동하라는 쪽지 한 장에 그 집착했던 일들을 두고 새 부임지로 향한다. 초점 없는 신부의 눈동자에는 물기가 돈다. 환송하는 신자들은 그것을 뒤에서 보지 못한다. 새 부임지에서도 역시 천만 년 거기서만 살 듯이 계획을 세우고 땅을 파고 집을 짓고 방문을 하고 그리스도께 모이자고 목이 쉬도록 떠들어 댄다.
그 많은 신자들의 구미에 맞도록 살아야 한다.『신부님 앉아서 말하시오 서서 말하시오 고단한데 누워서 말하시오』 그 많은 말들 중 어느 것을 들어도 다른 사람들은 자기 말만 안 들은 것으로 여긴다.
가끔 이런 성경 말씀이 생각난다. 아이들이 장터에서 피리를 불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왜 당신은 내 피리소리에 맞춰 춤을 추지 않소?』어느 장단에 춤을 출까? 돈을 내라고 말을 하란다. 신부는 돈소리를 하지 말란다. 그 소리를 해도 안 해도 저 신부는 다른 사람 말만 듣는단다.
이렇게 일생을 지나다가 호호백발 인생의 황혼길에 서는 찾아 주는 이마저 없다. 그래서 신부는 외로운가. 그래서 비애스러운가? 아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화려한 일생을 보내셨다면 모르되 만일 수난과 십자가의 고통이 없었던들 모르되 우리는 행복하다 행복하여라. 의를 위해서 우는 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