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가친께서 58세를 끝으로 이 세상을 떠나 주님의 품안에 들어가셨다. 병원에서 가녀린 인생의 낙엽은 현대 의료기구 속에 더욱 서글프고 초라하게만 보여졌고 임종을 집에서 맞기위해 다시 모시고 되돌아가는 구급차의 질주는 어두운 밤에 싸늘한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미 나에겐 몇 차례의 다른 회오리바람이 스쳐 지나갔고 바로 이어서 이런 인생의 비애를 또 맛보게 되었다.
설상가상인 이 소용돌이는 내 생애안에 하나의 굴곡을 만들어 내고있다. 병원에서의 싸늘한 고적속에서 어느 외국수녀의 간절한 기도와 신의에 찬 눈길, 그리고 어느 교우의 위로의 말, 이 안에서 나는 마음의 정립을 찾을수 있었고 연미사를 드리면서 충실했든 부족했든 내 부친의 생애를 정성되이 주님께 모두 바칠 수 있었다.
흔히 60도 못 넘긴 죽음, 자식 하나 끈부침도 해주지 못하고 홀홀히 떠난 그 인생에 많은 사람이 오열을 금치 못했다. 3일후 부친의 육신을 흙으로 보내드리던 날 교구의 신부님들이 많이 찾아주시고 주교님께서 동창신부들과 같이 장례미사를 드릴때 나는 분명 주님께 감사의 기쁨을 전해드렸다. 부친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분명 내 마음안에서 쉽게 뵈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부친의 죽음, 맏아들이 사제가 되도록 뒷바라지하시느라 그리고 사제의 길을 힘있게 걷게 하고자 그 가난을 더 깊게 맛보셔야만 했던 그 인고의 얼굴 표정이 내 마음안에서 진정 더할수 없는 기쁜 모습으로 변하신 것이다.
『가난이 아니었던들 이렇게 쉽게 세상을 떠나시지 않으셨을텐데…』하는 자식된 쓰라린 안타까움도 그 순간부터는 사제의 길을 다시 마름질할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부친께서는 생전에 자주 듣던 일이지만 더욱이 어머님께서 뱀에 물려 병원에 입원하셨을때 엄청난 입원비 일부를 간신히 빚을 얻어 대느라 더 초췌하신 모습으로 어머님의 손등을 만지시며『살든 죽든 우리를 위해 미사를 올려줄 귀한 아들신부가 있지않소 나는 언제나 미덥소』하시던 말씀이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부친께선 이제서야 비로소 사제인 아들의 품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최상의 아늑함을 맛보셨을 것이며 장례미사에 참석했던 외교인까지도 자식중에 신부가 있었으면 하는 부러움을 알려주고 떠나셨다. 외교인의 입에서까지 이런 말을 들으면서 나는 잘 다듬어진 부친의 묘소 앞에서 슬픔속에 아늑한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