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예수를 믿은지가 40년이 훨씬 넘는다. 그것도 한눈 팔지않고 전문적으로 믿어왔다. 아마 딴 일에 외곬으로 이렇게 파고들었다면 박사의 고조 할아버지쯤 되었을거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내가 40년동안 믿는 예수의 상이 명확하지가 않다. 성경을 읽었고 유명하다는 예수의 전기도 읽었고 철학 신학으로 제법 학술적인 연구도 해보았지만 예수의 상은 자꾸만 바뀐다.
내가 예수에 대해서 가장 뚜렷하게 확고부동한 상을 가졌던 것은 국민학교 시절 수녀님한테 교리를 배울때이다. 그때 나는 예수님은 저 수녀님과 같은 이를테면 남자수녀님일거라고 생각했었다. 성스럽고 자애스럽고 그러나 어떤 때는 좀 무서운…그때 나는 커서 남자 수녀가 되리라고 마음을 굳혔다. 그 후 나는 성당 맨 앞에 높히 매달린 십자고상이 예수의 진상임을 깨달았다.
혈기발랄한 중학시절이었다. 그때부터 나도 예수와 같이 십자가에 달릴 수 있는 훈련을 쌓았다. 물론 마음속에서 였다. 신학도가 되어서 예수의 참 모습은 복음서에서 찾아야 함을 알았다. 불전, 논어는 한문이라서 읽을수가 없었는데 복음서는 한자가 없어서 읽기 쉬웠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금이요 옥이다. 이렇게 재치있고 훌륭한 말씀을 할 줄 아는 예수는 굉장히 머리좋은 분일거라고 생각하였다.
99마리의 양보다 1마리의 양이 더 귀하다는 이치는 아담ㆍ스미스의 수요공급의 경제원리를 생각하였을지 모르고 수학적으로는 아인슈타인이나 폰ㆍ브라운을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요새는 예수를 노동혁명가라고도 하고 사회정의구현의 혁명가라고도 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사회주의도하고 자유민주주의도 한다.
그러나 역시 어린 시절에 순박한 수녀님한테 배운 예수상이 제일 좋은것 같다. 성스럽고 인자하고 때로는 좀 무섭기도 한…이거야말로 인간의 모범형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동시에 하느님이 아니고는 가질 수 없는 덕이기도 하다. 인생은 무르익으면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예수를 믿기가 그리 어려울리가 없다. 어린 시절의 믿음이 가장 순수한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