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사목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데 어느날 학부형이 되는 아주머니 한 분이 찾아왔다. 『신부님은 혼자 사실텐데 이렇게 큰 집을 쓰십니까? 』하고 의아스럽게 묻는다. 천만다행이었다. 『아닙니다. 이 작은방 하나에 세들어 있습니다. 부엌도 주인집과 같이 쓰는 형편이죠』그러면 그렇지하는 안심한 표정인가 싶더니 다시 또 묻는다. 『아니 신부님은 역사깊은 큰 학교의 이사장이신데 이런 방 한칸에 세들어 사신다니 우습군요? 』두 물음이 다 일리는 있는데 그럼 어쩌란 말인가. 나는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순간 내 믿음이 헤어날 길을 제시해주었다. 태연하게 물었다. 『아주머님도 결국 셋방살이 하시지 않습니까? 』 『아닙니다. 신부님! 』고생끝에 지금은 내 집을 쓰고 있노라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내 볼과 팔 내 몸을 가리키며『이것들이 내 것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빌려 쓰고 있군요. 그나마 일방적인 계약에 의해 세들어있는거죠. 주인이 내놓으라면 오늘이라도 내드려야 하니까요』
『신부님은 엉뚱한데로 얘기를 돌리시는군요! 』(글쎄올시다. 얘기가 껑충 뛰었는지는 몰라도 진리가 엉뚱하게 들려서야 이거 되겠습니까).
신부를 아끼지 않는 교우가 있으랴마는 나를 아껴주는 몇몇분이 진정으로 충고를 하는 것이었다. 노후대책으로 낭비(?)하지 말고 저축하라는 것이었다.
신부란 돈이 많아서 잘쓰면 그 나름으로 좋고 없어서 가난하게 살면 그 나름으로 덕이 되는 참으로 편리한 신분임을 생각한적은 있었다. 그런데 노후를 걱정해서 저축해야 한다는 말이 아무리해도 고맙게 여겨지지 않는것은 왜그럴까? 나이 40이 아직 젊다고 해서일까? 지금까지 돈걱정 한번 하지 않고서도 이렇게 건재해왔는데 새삼스럽게 지금에 와서 돈에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굴욕감에서일까? 아니면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시오. 그 밖의 모든것은 덤으로 주겠소』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서일까? 아무려무나, 내 분수로는 두 마리 토끼를 한번의 일생으로는 잡을 능력이 없으니 한마리에만 집중할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