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령시절의 어느해 추석날이었다. 부엌식구들까지 모조리 귀향하고 집은 텅텅 비었다.
추석이라 음식 사먹을 곳도 없어 라면 하나 끓여먹고 설겆이까지 끝낸후 모처럼의 휴가를 축구왕 펠레가 나오는 세기적 경기를 보려고 TV앞에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이때 노크소리가 나더니 잘 아는 교우대령과 처음보는 외교인 소령 한 분이 찾아왔다.
그 소령은 퍽 불안한 모습이었는데 해결이 매우 어려운 문제가 있음을 첫 눈에 알 수 있었다.
예측대로 듣고보니 내용은 어마어마.
소령이 마누라가「계」하다 몫돈날리고 빚쟁이들에게 쫓기자 돈 얻으러 잠깐 나간 것이 그만 몇 일 자리를 비우게 됐단다.
그 사이 공교롭게도 어떤 간첩 용의자를 수배하다 보니 소령과 먼 친척인지라 수사기관에서 소령을 찾아왔다.
그러나 소령은 행방불명. 과원에게 아무리 물어도 집안 일로 잠깐 나갔는데 아직 안 온단다.
부대는 발칵 뒤집히고 전국에 수배, 드디어 붙잡혔다.
조사끝에 간첩용의자와는 상관없는 것이 밝혀졌지만 크게 물의를 일으켜 별단 상관이 난처하게 됐고 결국 탈영으로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워낙 일이 커서 누구하나 변호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연금대상 만기소령인지라 형을 받으면 무일푼이 되어 가족도 망하고 채권자들도 망하게 된다면서 울먹인다.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고생끝에 다른 혐의는 벗고 군복만을 벗는(예편)것으로 판결이 났다.
얼마후 소령사건을 다룬 검찰부장을 만났더니『신부님, 군복도 안 벗겼으면 좋겠지만 도저히 그럴수가 없어서 죄송합니다』고 한다.
하도 간절히 여러번 부탁한지라 검찰부장이 도리어 죄송해하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나는 감사도 제대로 못하고 되려 인사를 받은격이 되고말았다.
군종신부 15년에 이런 크고 작은 일들이 비일비재해 그때마다 가슴 아프기 그지없으나 그래도 이런 인연으로 그 중에 누군가 영세를 받을 때 맛보는 기쁨으로 전후방을 오르내리며 살아간다.
어떤 이는『신부님은 혼자사는데 무슨 고민이있느냐』고 하지만 그 소령의 인간적 고민이 곧 내 고민이 되니 어찌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