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신부가 장가갔다>고 내기를 건 신학교 은사 신부님들이 장계간 소감이 어떠냐고 묻기에 영문도 모르고 좋다고 하니까 둘러앉은 신부님들이 한바탕 웃으신다. 신부가 되어 처음으로 간 본당이 바로 장계라고 불리우는 전북 장수군에 위치한 촌본당이었다. 그러니까 장가(결혼) 아닌 장계를 수백번간 호걸(?)이 된 셈이다. 하기야「시집」이라는 마을도 있다니 신부가 시집갔다는 말보다는 장계 갔다는 말이 좀 실감이 난다.
산 너머 산이라더니 스릴을 느끼면서 험준한 아흔아홉 고개를 넘어서서도 다시 연속되는 고개에 귀양가는 것처럼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울면서 부임하고 울면서 떠났다는 선임신부의 말대로 2년 남짓 촌본당에 살면서 다정하고 순박한 신자들과 정이 들었던지 정말 떠날때는 목이 메이는 것을 억지로 참으면서 장계본당을 떠났다.
정든 본당을 떠나 군대에 종군한지 어언 십여년이 지났지만 매년 사순절이 되면 삼백리쯤 되는 산길을 걸어 20여개나 되는 공소 순방길이 생각난다. 엄숙한 몸가짐으로 등산을 즐기면서 산넘고 개울을 건너 끝없이 걷다보면 깊은 산중에 외딴 마을들이 나타난다. 옛날 박해때 피난온 신자들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고을들이다.
나랏님의 행차가 무색할 정도로 십여리까지 마중나온 꼬마들은 명절때나 입는 새옷을 입고 마냥 즐거운 표정으로 신부의 앞 뒤를 에워싼다. 그들에게 점령되어 생리적 볼일도 참아가며 공소에 도착하면 대기하고 있는 교우들과 간단한 기도를 바친다.
기도가 끝나면 할아버지로부터 시작해서 꼬마들까지『신부님 봅시다』하며 수십명의 큰절을 받아야 한다. 신부가 추울까 염려하여 한증탕을 만들어버린 온돌방에 앉아 큰절을 받다보면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무릎이 아프다.
간단한 다과상을 물리면 교리강의 겸 찰고가 시작된다. 고백의 성사를 듣고 난 후에는 저녁에 간단한 오락회를 주관한다. 밤늦게까지 돌아갈 줄 모르는 모든 이의 시선을 받으며 골고루 대화를 나눈다. 새양쥐와 물것을 벗삼아 잠자리에 들기가 무섭게 새벽미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교우들이 모여든다.
미사가 끝나면 다시 짐을 꾸려 다른 공소를 찾아간다. 거의 한 달 동안 계속되는 공소 순방을 마치면 부활축일이 다가온다. 진정 홀가분한 부활축일을 맞이하곤 했다.
공소날을 연중 가장 즐거운 날로 지내는 순박하고 가난한 그들을 위하여 조그마한 공소 강당을 지어주지 못하고 그곳을 떠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