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63세. 마음은 푸르건만 육신은 늙어 신부된지 37년 주교된지 7년 물불을 가리지 않던 청춘시절이 어제같은데 사목생활의 연륜이 37년을 헤아리니 과연 인생이 유수같구나. 돌이켜 보건대 지나온 길이 순경 역경에 휘말려 그 어느것이건 마치 스크린에 나타나는 영화처럼 재미있는 장면도 있거니와 나의 어리석음을 책할 어두운 면도 적지않다. 그 중 가장 인상깊었던 일은 신부된지 1년도 채 못되어 경남 남해공소에서 겪은 일이다.
가을판공을 치르러 갔을 때였다. 삼천포에서 통봉배를 타고 남해읍 선착장에 다다르니 경찰서에서 순사가 벌써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유는 불문곡절하고 경찰서로 가자는 것이었다. 서에서는 신분이 무엇이냐 어디서 왔느냐 무엇하러 왔느냐 어느학교를 나왔느냐 프랑스 신부 한테 교육을 받았으면 스파이가 아니냐 천주가 더 높으냐 천황 폐하가 더 높으냐 하며 별별가지 질문을 퍼부었다. 성신의 도우심으로 마치 뱀이 꼬부랑길을 살살 지나듯이 적당히 대답을 하여 한 고비를 넘겼다.
느닷없이 또 미사짐을 조사하자는 것이었다. 그때만해도 가죽가방 같은것은 사치에 속한 물건이라 작은상자에 미사짐을 꾸리고 다녔다. 흙투성이가 된 마루바닥에 제의ㆍ성작ㆍ성합ㆍ제병ㆍ성작수건ㆍ성체포 등 감히 평신도라도 손을 못대는 성물들을 걸레처럼 취급할때 마음 아프기 짝이 없었고 항의도 했지만 아랑곳없었다. 약 한시간반후에야 경찰서에서 풀려나와 공소에 갔다.
교우들은 내가 경찰서에 구류된줄 알고 울며불며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이튿날 새벽미사 전에 고백성사를 주고 있었는데 또 순사가 와서 고백소에서 무슨 음모를 꾸미는지 기어이 알아보아야 되겠다고 하며 저도 고백소에 들어왔다. 고백성사란『신자가 일상 신앙생활에 무슨 잘못이 있으면 그것을 비밀히 고백하는 순수한 종교 행위』라고 설명을 하고 이것만은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고 강경히 거절하여 고백소에서 나가도록 종용했다. 고백하는 신자라야 15ㆍ16명 밖에 없었다. 그리고 미사를 지내는 동안에도 강론때 무슨말을 하는지 모두 체크를 하고 있었다. 소위 대동아 전쟁때 왜놈들에게 신부들은 이렇게 망신을 당하고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그때처럼 신부가 된 보람을 느껴본 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