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歲暮)의 우리네 감회(感懷)에는 수수로운 회오(悔悟)가 깃들이기 마련이다. 연도를 정확히는 기억하고 있지 않지만 내가 왜관본당 보좌로 있었을 때의 어느해 음력 섣달 그믐날이었다.
오랜 관습으로 거리는 양력 때보다 더 세모의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여느날보다 분주하고 어수선한 일과를 치른 뒤, 밤에 홀로 책상머리에 앉아서 한 해 동안 덧없이 보낸 시간의 맥락(脈絡)을 헤아리며 이런저런상념(想念)에 젖어 있었다. 거의 자정이 가까왔을 때 전교회장님으로부터 위독한 병자가 있으니 종부성사의 준비를 하고 가 봐야겠다는 연락이왔다.
필요한 것들을 대충 챙겨가지고 회장님과 함께 어두운 밤길을 달려 성주 고개 밑에 있는 병자의 집에 당도했을 때 그 찌그러진 초가의 방 안에는 이미 가족들의 오열(嗚咽)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걱정한 대로 병자는 벌써 숨을 거두었고 얼굴에는 창백한 죽음의 그늘이 깔려 있었다. 40대 안팎의 남자였다. 내가 한 발 늦은 것이었다. 조건부 사죄경을 외우고, 돌아 앉아 가족들에게 위로의 인사말을 건넸다. 방 안에 세간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정말 가난하였다. 그나마 이제까지 의지해 오던 한창 나이의 가장을 잃고 문자 그대로 적빈무의(赤貧無依)의 처지가 된 가족들에게 백면서생인 젊은 신부의 몇마디 말이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본당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길은 무거웠다. 그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하게 죽어간 남자에게 종부성사를 주지 못한 것이 못내 서운하고 우울했다. 마지막 가는 사람에게 더구나 그렇게 불쌍한 사람일수록 이 성사를 통해 우리 주님의 위로와 믿음의 용기를 주는 것이 신부의 임무이다.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그것을 주지 못한 나는 무슨 배임행위를 한 것 같은 회오에 젖어 그날 밤 눈을 옳게 붙이지 못했다.
그리고 그 후 어쩌다 부고를 받거나 장례식에 참석할 때면 가끔 그 섣달 그믐날 밤의 가난한 남자의 죽음과 나의 회오가 되살아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