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들이 신부의 가정방문을 달갑잖게 여긴다면 무언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지난 번 서울에 갔을 때 일이다.
신학생 시절에 본당에서 독서 그룹을 함께 했던 회원들을 만났는데 그 가운데 C가『신부님이 가정방문을 오면 반가움보다 어떻게 왔을까 하는 의혹과 함께 이번에는 무엇을 요구할까 라는 생각이 앞선다.』고 했다. 그리고 난 후 햇병아리 신부인 나를 보고『신부님도 사목상의 방문이지만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 신자들이 목자의 방문을 기쁘게 여길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나는『어떻게 해서 신부님의 방문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드리지 못합니까?』하고 질문을 했다. 그는 단적으로『신부님은 신자들이 방문을 바랄 때는 오지 않지만 신자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 방문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짧은 사목 생활이지만 나도 그런 방문을 할 것 같다. 신부가 된 후 보좌신부로서 첫 부임지에 갔다. 그 본당에서 새 성당 신축을 계획 중이고, 본당사업에 새 성당 건립을 최우선으로 두어 모든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도 본당 신부님을 도와 그 기금을 모으기 위해 면(面) 있는 신자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도움을 청했다. 많은 신자들이 그렇게 달가운 눈치는 아니었으나 방문한 목적을 알고 반가이 맞아 주었다. 그러나 어떤 신자는 방문을 통고 받아 목적을 이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문을 거절했다.
한마디로 신부의 방문을 달갑잖게 여기는 것이다. 내가 도움을 바라기 전에 그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영적인 도움을 주었더라면 거절치 않았을 것이라고 반성해 본다.
사목상 가정방문은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사제들에게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사정을 알아야 맡은 바 임무를 다할 수 있으리라. 많은 신자들이 있고 손이 부족한 도시본당 신부들은 각 가정을 전부 방문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목자의 방문을 필요로 하는 일이 없는가 관심을 갖고 요청이 있을 때 기꺼이 찾아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때 방문은 신자들에게 그 이미지가 흐려지지 않고 기쁨과 반가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방문은 진정 그들을 위한 것이기에 따라서 양들이 도움을 바라고 필요할 때 찾아가는 목자가 착한 목자이리라.『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잘 압니다』(요한 10ㆍ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