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후반기의 여걸이며 평화와 화해를 위해 몸바친 성녀는 1344년「시에나」에서 염모업자인 부모에게서 24번째의 아이로 태어났다. 내성적인 성격을 지닌 이 소녀는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겠다고 약속했으므로 결혼시키고자 하는 어머니에게 끝내 반대하였다. 그 벌로 까타리나는 양친의 집에서 여종처럼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녀는 자기 소원대로 도미니꼬회 제3회에 들어가 완전한 봉쇄 안에서 3년간 기도와 엄한 고행 생활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하고 신비스런 체험까지 하였다. 그러자 그녀의 내적 빛은 곧 외부에까지 드러나게 되었다.
1374년「시에나」에페스트 전염병이 유행하고 있어 많은 이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었다.
이때에 성녀는 버림받은 유태인과 사생아들과 함께 살면서 가엾은 병자와 나환자들까지 헌신적으로 보살펴주며 간호하였다.
비록 많은 교육을 받지 못한 까타리나였지만 이 같은 사회적 사도활동뿐 아니라 서로 원수관계를 맺고 있는 귀족 가문들 사이에서 그리고 분열되어 아귀다툼하는 정치 당원들 사이에서 그들이 반성하고 사고를 달리 하도록 그녀는 현명하게 중개 역할을 하였다. 성녀는 많은 편지에서『평화! 평화로이 지내십시요!』하는 말을 거듭 되풀이하였으며 강조하였다.
성녀의 활동과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동료 수녀들은 까타리나가 거짓 수작을 부리고 명예욕에 사로잡혀 그런 짓을 한다고 비난을 하였다. 성녀는 교회 안에서 재판장에 서게 되었고 1374년「플로랜즈」에서 열린 도미니꼬회의 총회에까지 불려가 심문을 받았지만 결국은 승리하였고 올바른 인정까지 받게 되었다.
이처럼 화해를 위해 투쟁하다가 1380년「로마」에서 숨진 이태리의 대주보이신 성녀 까타리나는 우리에게 3백81통의 편지와 영성에 관한 1천3백78개의 훌륭한 문헌을 남겨 놓았다. 축일은 성녀가 별세한 날인 4월 29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