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신부는 만민의 어버이라고 한다. 만민들보다 더 훌륭해서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신부들보다 더 훌륭한 신자들이 무수하다. 다만 그리스도의 대리자 구실을 즉 그리스도에게서 합법적으로 받은 성사와 성무 집행권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여하간 어버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그 어버이라는 책임이 너무나 크고 무겁다. 그리고 귀중하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사목의 일터인 교회에 가난한 약자가 너무 많이 살고 있다. 이 가난한 약자란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또 신앙적으로 어버이의 도움이 극도로 필요한 약자들을 말한다. 이런 약자들을 도와주고 선도함은 하느님이 명하시는 지존한 계명이다.
이 계명은 바로 우리의 제일 가는 의무이고 책임이다. 그래서 이 의무와 책임은 모든 사람들이 다 지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도 언제든지 앞장서야 할 실천의 제1인자는 바로 신부들이다. 이것이 바로 어버이들의 문제점이 되고 있다. 이 문제점들과 함께 40 평생을 두고 함께 살아 왔었다. 생각하면 의료비가 없어서 죽기만 기다리는 환자들, 거기다가 집도 절도 없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었던가? 파산의 선언을 받고 실망에 빠져 있었던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이 만났었던가? 직장을 잃고 가족을 굶기고 있는 사람들의 호소를 들은 때도 있었다. 입시에 합격은 했는데 학비가 없어서 죽어야 되겠다고 애원하는 젊은 학생도 있었다. 그리고 심심찮게 구걸을 하러 오는 사람들의 요구?
그리고 또 자기 가족이 위급한 상태에 있다는 전보를 받고『급히 가야 하는데 여비가 없으니 … 』등등. 그리고 지금은 또 새마을 운동의 정신 의식 구조와 변화가 온 강산을 뒤덮고 있는데 아직도 구태의연한 지방 공소의 실태와 그들의 생활 환경 그리고 의식 구조『어떻게 좀 해볼 수가 없을까?』이 모든 것이 다 어버이들의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이런 문제를 어버이로서 나는 얼마나 도와 주었고 해결해 주었는가? 그 답은 시원치 않다.
너무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지 못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힘이 없었다. 무능했었다. 너무나 마음 아픈 일들이다. 다시는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과오를 다시는 범치 않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떤 제도가 필요할 것인가? 자문자답의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계속 질주만 한다. 나는 고민한다.
어버이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었고 지금도 뭔가 석연치 않는 해결뿐이다. 약자들은 지금도 내일도 어버이를 부르고 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