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본당에 있을 때 일이다. 가을 판공을 위해 본당과 공소를 순회하며다 가을 성탄 준비에 분주한 판에 어느 낯 모르는 아가씨에게 편지 한 장이 날아왔다.
판공 때가 되면 흔히 있는 것과 같이 외지에서 교회에 발걸음을 멀리하다가 대축일을 맞게 되면 마음에서 희미하게 사라져 버렸던 하느님 모습이 되살아나 고백성사를 보고 성사표를 보낸다든가 아니면 교적을 보내 달라는 등의 부탁 편지가 심심치 않게 날아들어온다. 역시 그런 종류의 편지겠지 하고 편지를 뜯어 펼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제목이「탈퇴서」라고 적혀 있는 긴 사연의 편지가 아닌가! 도대체 나 자신이 탈퇴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내게 탈퇴서를 제출한 일이 무엇일까 하고 의아해하면서 내용을 훑으며 내려갔다.『신부님! 저는 XX공소 신자였는데 수 년 전부터「여호와의 증인」신도로서 활약 중에 있으며 집에 여러 번 편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또 판공성사 표를 보내왔으니 아직도 내 이름이 지워지지 않은 모양이니 즉시 신부님이 저를 제명해 주십시요. … 탈퇴를 선언합니다』는 내용이었다.
명시적으로 탈퇴서를 제출하는 사람보다 말없이 탈퇴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하면서 자위를 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개운치는 못했다.
공소에서 구교 집안이라고 알려진 가정의 자녀였으니 더욱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부모를 만나 이야기하니 서울에 가서 공부하는 도중 집에 오는 성적표에 만족했고 졸업 후 취직하여 몇 푼 보내 주는 돈에 만족하다 보니 이 꼴이 되었으니 부모인들 이제 어찌 하느냐면서 한탄만 할 뿐이었다.
왜 어릴 때부터 하느님의 진리를 깨닫도록 돌보지 않았는가? 재산은 후대에 물려 주려 하면서 왜 나의 신앙은 물려 주려 하지 않는가? 자녀의 학과 성적에만 눈독을 들이고 종교 교육에는 무관심한 부모들이야말로 장차 하느님께 탈퇴서를 제출할 소질을 키워 주고 있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