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사장 안녕』나의 별명이 돼지사장이 돼 버렸다. 그래서인지 한동안은 사람 얼굴을 보고도 돼지 종자처럼 분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 괴짜 신부가 되기까지 얽힌 사목 경험은 哀恨의 연속이었다. 사람들도 돼지 종자 개량하듯 친절하고 협동하고 기도하고 사랑할 줄 아는 종자로 개량할 수 없을까 하는 푸념을 해 보기도 한다.
세례를 받은 자는 개량된 종자이다. 자연인으로 잡초처럼 돌에서 자란 자가 하느님의 정원(교회)으로 이식되어 하느님의 은총으로 새 사람이 되어 초자연성을 부여받은 거듭난 개량종이 아닌가! 그러면 범인들과는 다른 점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 나의 지론인데 사목을 해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지난 평신도주일 날 사도회장님이 본당 신부가 쌀이 떨어져 라면으로 끼니를 연명한다니까 반응이 볼 만했다. 20리 떨어져 사는 할머니 한 분이 고구마 자루와 보리 자루를 머리게 이고 와서 하는 말씀이『신부님, 저는 제가 먹고 사는 대로 가져왔습니다. 신부님이 굶어서야 되겠습니까. 제가 굶는 한이 있어도 말입니다』하고 그 축복받은 거칠은 손으로 내 손을 꼭 쥐면서 눈물을 글썽거릴 때 나도 모르게 눈물 방울이 맺혔었다. 나는『왜 저 촌로와 같은 순박하고 속박한 인정미 있는 사제가 못 되었습니까?』하며 목메어 기도한 적이 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소위 유지급의 부유한 신자의 무반응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아마 신부가 굶어 죽었다고 해야 반응이 일어날지 모르겠다.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물로 개량된 독자 여러분, 어느 벽지 시골 본당은 이렇게 사막과 같이 사목 활동 여건이 죽어버린 지 오래된 곳도 있다는 것을 알아서 우리 교구 우리 본당만 찾는 폐쇄적인 사고방식에서 깨어나야겠습니다.
지역사회 개발이란 미명하의 양돈협동사업이 사료 파동으로 폭삭 망해 버렸다. 그 원인인즉 전망이 흐려지니 더 이상 출자를 않아서였다.
그렇지만 신부란 공신력을 지키기 위해 출자금을 원금 상환해 주었는데 개량종은 천연스럽고 미개량종은 미안해 하더란 넋두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