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주교시노드 제7차 정기총회 기간중인 지난 10월 4일 명의 평신도 순교자에 대한 시복식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주례로 성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됐다. 이날 시복된 3명은 복자 마르셀 갈로 (프랑스 ㆍ 1945년 옥사) 복녀 안토니아 메시나 (이태리 ㆍ 1935년 순교) 복녀 피에리나 모로시니 (이태리 ㆍ 1957년 순교) 등 복자 1명 복녀 2명이다. 특히 「지나치게 가톨릭적」이란 이유로 죄인이 됐으나 『이 세상의 모든 노동청년들이 본받을만한 또 하나의 작은 그리스도』라는 교황의 말로 백배의 보상을 받은 복자 마르셀갈로의 생애를 그의 영성과 죽음의 의미를 중심으로 간추려본다.
프랑스 JOC회원으로서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에서 용기있는 죽음을 맞았던 마르셀 ㆍ 갈로 (1921~1945) 가 사후 42년만에 시복의 영광을 안았다.
마르셀 갈로는 23년의 짧은 생애를 투철한 JOC 투사로 살아왔으며 극도의 생존적 이기주의가 팽배한 강제수용소에서도 「기도」와 「동료」를 잊지 않았던 의인으로서 그의 시복은 오늘날의 젊은 신앙인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있다.
마르셀은 1921년 12월 6일 프랑스 「브르타뉴」에 있는 한 독실한 신자가정의 9남매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도로보수공사 서비스센터의 고용인으로 무척 성실했으며 어머니는 늘 자상했기 때문에 마르셀은 어릴때부터 물질적으로는 부족했지만 가정의 사랑과 신앙은 항상 풍부할 수있었다.
명랑했지만 학업에는 덜 열성적이었던 마르셀은 13살때인 1943년 「렌느」에 있는 한 인쇄소의 식자 견습공으로 취업, 일찍부터 노동자의 길에 들어섰다.
9년간의 견습공 시절 조통과 굴조의 괴로움속에서도 JOC를 통해 성숙해졌으며 마리아께 대한 기도로써 슬픔을 이겨나간 마르셀은 악과의 투쟁, 책임감과 절제, 동료애를 쌓아나가면서 스스로 JOC 섹션의 지도자로 성장해갔다.
당시 16세의 마르셀은 『JOC가 요구하는 투사의 길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의 의무로서 우리는 우리들이 받은 「주님의 생명」을 남에게 나눠줘야 한다』고 기술할 정도로 JOC의 정신을 깊이 이해하고 또 실천하고 있었다.
그는 노동으로 인한 극심한 피로속에서도 고백성사와 월례피정을 즐겨했으며 매일 규칙적인 기도와 독서, 그리고 동료회원들과의 만남에 보냈다.
섹션외장으로서 동료애와 열성으로 JOC를 이끌어 간 마르셀은 1941년부터 거리의 청소년들을 모아 JOC활동을 전개했으며 2차대전 초기 피난민들을 위해 일하기도 했다.
1943년 봄, 쌍동이 동생들의 첫영성체, 형 요한의 서품식 그리고 자신의 약혼식을 앞두고 들떠 있었던 마르셀은 사랑하는 누이의 사망과 함께 나치독일로 부터 의무노동 통지서를 받아 큰 충격에 빠지게 됐다.
그러나 마르셀은 『나는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사도로서 파견되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그해 3월 19일 라이프찌히서쪽 작은 도시 「젤라메히리스」로 향해 출발했다.
형편없는 막사와 배고픔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마르셀은 동료 청년들을 모아 신앙생활을 이끌면서 그리스도의 고통을 자주 묵상했다. 그리고 연발 로케트가 가장 느리게 발사되도록 조치하는 일도 잊지않았다.
이무렵 마르셀은 영양실조와 치통, 두통으로 격심한 어려움을 겪고있었지만 동료들의 자포자기 생활을 방치할 수 없어 스카우트 단원, 신학생, JOC회원들을 규합, 신앙 모임을 결성했다. 가톨릭신자들은 나치에게 박해받고 있었지만 마르셀은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동료들에게 용기를 던져주었다.
그러던중 마르셀은 「너무 지나치게 가톨릭적」이란 이유로 게쉬타포에게 체포당해 지하감옥으로 끌려갔다.
거기에서 다른 JOC회원 12명을 만난 마르셀은 저녁식사 시간을 틈타 서로를 위해 기도를 봉헌했으며, 감옥을 「까다꼼바」 (로마시대 지하묘소로 신자들의 기도장소) 곧 교회로 만들어 놓았다.
5개월간 판결을 기다리면서 들에 나가 강제노역에 시달렸던 마르셀은 1944년 9월 나치정부에 해를 끼친 가톨릭 신자라는 죄목하에 다시 「마우타우젠」의 악명 높은 형무소로 끌려갔다.
70㎝의 매트위에 두명이 겹쳐자야하고, 돼지죽을 먹고, 홀겹옷과 맨발로 지내면서도 하루 12시간의 중노동. 식사라 해도 씻지도 않은 당근 잎과 감자 껍질로 만든 스프가 고작이고 그나마 6명이 나눠 먹어야하는 동물이하의 생활속에서 마르셀은 하루에도 수십 ㆍ 수백명의 시체를 봐야했으며 자신또한 극도의 위기상황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마르셀은 「매순간 함께 하는 벗」들을 포기하지 않고 동료들에게 스프를 나눠주며 함께 기도하곤 했다.
1945년 3월 19일 기관지염과 극심한 영양실조로 인해 마르셀은 불결한 의무실안에서 조용히 주님의 품에 안겼다.
그의 죽음을 지켜본 유일한 프랑스인은 마르셀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토록 온화하게 어떠한 저항도 하지않은채 그는 저 하늘나라에서 말 할 수 없이 아름다운 생명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죽음을 수락했다. 그는 끝내 아무말이 없었고 전혀 비통해 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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