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기관 종사자들 중 10년 20년 혹은 그 이상의 세월을 근무한 사람이 많다.
서울 가톨릭대 신학부 교내 이발소에서 25년을 한결같이 근무해 온 이발사 임충기(56ㆍ가예따노)씨의 경우도 이러한 장기근속사 중의 한사람이다.
그러나 임씨보다 더 오랜 경력의 소유자가 많음에도 북구, 임씨의 4반세기가 세인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가 「이발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점과「신학교」라는 특정 장소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1961년 큰 아들의 대부가 신학교 이발사였던 것이 인연이 돼 그 후임으로 신학교에 발을 들여놓은 임씨는 신학교와 신학생이 좋아 그대로 눌러 앉은지 금년으로 25년, 은경축을 맞았다.
이발경력 40년에 견습시절과 개인이 운영하던 이발소에 몸담은 15년을 제외하고 한결같이 「신학교 이발사」를 고집해온 임씨는 신학교에서의 25년을 『그냥 좋았고 보람있었다』는 말 한마디로 요약했다.
충남 천안에서 출생했지만 반평생을 경북 김천에서 보낸 임씨는 가세가 빈곤해 15살에야 겨우 국민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으며 졸업 후 곧바로 이발소에 취직해야 할 만큼 생활이 어려웠다.
화장실에도 변변히 못다니던 혹독한 견습생 시절 밤에 잠도 자지않고 파출소 야간근무를 하며 돈을 모아 야간중학에 입학할 정도로 강한 학구열의 소유자였다.
중2 때 6ㆍ25동란으로 가족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단신으로 부산 피난길에 올랐던 임씨는 군에 입대 후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면서도 끈질긴 삶의 의욕을 버리지 않았다.
김천에서 결혼한 후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한 임씨는 하복 하나만으로 4계절을 보내고 밥그릇 하나만으로 부부가 함께 식사해야 하는 등 갖은 고생을 겪어야했다.
새벽에는 우동장사, 낮에는 이발사, 밤에는 인조꽃 만드는 기술자로 하루 3개의 직업을 가지면서 성실하게 일한 덕에 명동에 있는 이발소의 책임자로 자리를 굳히고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그러던 중 임씨는 큰 아들 대부였던 당시 소신학교 이발사의 권유로 신학교에 발을 들여 놓게 됐다. 비록 당시 초봉이 일반 이발소보다 높지 않았지만 임씨는 신학교를 평생 직장으로 생각, 성실히 일해 나갔다.
세례를 받고 신학교의 도움으로 52세때는「내집」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동안 쵀재선 주교, 지학순 주교, 정진석 주교 그리고 수많은 사제들이 임씨의 손으로 머리를 다듬었다.
『이발경력 40년에 이제는 머리형만 봐도 미리 도면을 작성, 이발할 수 있다』는 임씨는 『그 동안 신부 곧 신의 아버지 머리를 만져보면서 늘 기도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지난 3월 큰 아들이 혼인성사를 받는 등 큰 경사를 맞은 임씨는 환갑이 다가오는 나이에도 점심시간이면 신학생들과 농구를 할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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