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제키엘예언서 (VI)
17장은 역사적 배경을 깔고서 묘사되어 있다. 강대국을 독수리에 비유하고 송백 끝에 난순을 여호아긴에, 새로난 종자를 유다의 마지막 王 시드키야에 비유하면서 유다가 신하된 위치에서 바빌론과의 서약을 깨뜨린 때문에 시드키야 때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처절한 상황이 은유법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레미야가 유다의 마지막을 절박감에 싸여 묘사했던 것처럼 에제키엘도 여기에 대하여 긴장감을 고조시키면서 정확히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 마지막 절(22~24)에가서는 회복의 약속이 숨겨져 있다.
그날에는 메시아와 그 보편적 왕국 아래 모든 것이 깃들 것이라는 위안이 담겨져 나온다.
18장은 에제키엘 신학의 특성이 배어나는 의미 깊은 장이다. 여기서 14장의 「책임은 개인에 있다」는 사상을 보다 깊이 다루어 그 당시에는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였지만 그들의 사상에서 한차원 도약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예레미야와 에제키엘 시대에는 특히 무죄한 사람이 받는 고통이 하나의 큰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오늘 우리의 세대에도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지 않는가! 지금도 간헐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포성 속에 무죄한 자들이 역사의 희생물이 되고있다. 『하느님이 진정 정의롭다면 왜 이와 같은 끔찍스러움이 일어나는가?』라는 의문들 앞에 의인이 받는 고통은 신앙의 차원안에서만 그 해명이 가능하다는 지평이 보인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인 것이다.
『아비가 설익은 포도를 먹으면 아이들의 이가 시큼해진다』(18, 1~2)는 잠언을 통해 조상들의 죄 때문에 지금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저들의 그릇된 생각을 에제키엘은 깨우친다. 그는 야훼가 부당하다고 반항하는 철면피들을 향하여 하느님의 정의를 수호하여 나선다.
그런데 실제로 에제키엘 시대에는 목을 옭죄는 숙명적인 상황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이런 숙명적인 분위기를 바꾸려는 무진 애를 쓴다(18, 25~29). 인간편에서는 이런 부조리를 보고 『어찌 선하신 하느님께서 이런 끔찍함을 허락하셨을까?』고 체념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외친다. 이것은 아비의 잘못이 아들에게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강조하여 인간은 유전과 환경 그리고 역사적 산물의 꼭두각시가 결코 될 수 없다고 피력한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과 인격적인 만
남을 통해 그분과 사귀고 있다고 전언한다.
그런데 에제키엘은 여기서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고 고통은 회심과 신앙의 기틀을 마련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임박한 심판 앞에서도 마음이 완고한 백성을 보신 하느님께서는『너희가 죽다니 될말이냐, 죽을지를 지은 사람이라도 사람이 죽는 것이 나에게 언짢다.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살렸느냐? 마음을 고쳐라』
(18, 23)는 애소속에 하느님은 사람을 벌주고 단죄하는 것을 언짢아하시고 오히려 당신 자녀들이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것을 원하시고 기뻐하신다는 가르침을 명쾌히 밝히기도 한다.
19장에서는 마지막 왕들의 운명을 깊이 애곡하고 20장에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느님 친히 주관하시어 당신의 명예를 계속지키심을 역력히 보여준다.
21장에서 이제 죄악이 짙을대로 짙어 예루살렘의 종말이 촌본을 다툰다는 묘사 속에 놀라울 만큼 넓고도 심
오한 역사적 견해를 밝히고 있다.
서슬이 퍼렇게 번뜻이는 칼날이 종횡무진할 때 혼비백산하여 비틀비틀 쓰러지는 심판의 현장이 가일층 농축되어 나타난다.
이어오는 22장은 예루살렘은 자시들이 지은 죄 때문에 가차없이 피흘린 도성이되며 그 현장의 죄목이 조목조목 부끄럽다.
이제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는 「오홀리바와 오홀라」자매로 불리는 가운데 창녀짓에 비유한 우상숭배의 역겨움이 낯붉히게 하여 이 「두 음녀」의 행위에 대한 귀결은 뻔하다(23). 예루살렘은 이제 녹슨 솥으로 묘사되어 선민의 신세는 하느님 앞에 찌꺼기가 되었다는 그 한탄이 가슴에 멍을진다(24).
상징으로 시작했던 본 단락이 상징으로 끝을 맺고 있다(12~24장). 예언자는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도 애도하지 말라는 명을 받고있다. 이는 예루살렘의 죽음을 보고도 마음이 무디어진 백성들이 아픔마저 상실한채 비극을 비극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을 그려 그 답답함이 밀도있게 전해진다(24, 15~26).
이상으로 에제키엘은 자신의 설교활동 제 1기에서 동포들의 회심에 전력을 다했다. 하느님께로의 회심은 신앙의 눈을 열어보다 풍요로운 삶을 준다는 확신이 있는데 오늘도 에제키엘을 통한 하느님의 손짓을 허공에만 맴돌게해서야 되겠는가! (계속)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