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
어둠 속을 더듬어 머리맡에 둔 한 자루 초에 불을 댕긴다. 줄만 잡아당기거나 스윗치만 넣으면 활짝 대낮처럼 밝혀줄 60촉짜리 전기 스탠드의 문명을 피해 굳이 내가 택한 이 어두침침하고 거추장스런 한 자루 촛불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은 맴돌고 주황색 불꽃은 붓 끝처럼 어둠을 가르며 솟아오른다. 불빛 속에 희미하게 살아나는 물체들 그 흩어진 일상의 남루한 기색 흔들리는 선체에 산적된 생활의 중화물(重貨物)들은 어제와 다름없이 무겁고 음산하게 기척도 없이 누워 있다.
언제부턴가 한 자루 초에 당겨지는 불꽃의 흔들리는 음영, 그 넘치듯 눈부신 전등 불의 단 몇 촉의 광도(光度)도 미치지 못하면서 훨씬 생명의 열도와 진폭을 실감케 해주는 촛불의 생동감에서 나는 차라리 살아서 뛰는 육체의 맥박 같은 생명감을 느끼는 것이다.
코 끝에 스며드는 유황 내와 유지(油脂) 내음으로 하여 메슥메슥 헛구역질을 자아내면서 검은 묵주알, 불빛에 드러나는 검은 묵주알이 흑암으로 뭉쳐진 작은 석괴 덩어리처럼 희미한 불빛 아래 응결되어 있다.
두 손에 감아쥐면 가득히 고여오는 경건한 충만감, 마침내 깊은 골짜기로 떨어져가는 육신의 무중력 상태에서 나의 기도는 말을 잃고 아니 차라리 말이 소용없는 침묵의 바다가 된다. 사랑하는 것을 고통과 시련으로 괴로운 것을 멀리 헤어져 그리운 것을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하며 그 두 손에 지긋이 힘을 모으면 검은 묵주는 그대로 뜨겁게 가열되어오는 무쇠처럼 피 속까지 저려온다. 조석으로 식탁에 마주 앉은 식구의 머리 수가 하나씩 줄어가고 나의 말수도 그에 따라 줄어가고 창 밖을 내다보는 시간의 길이를 잊어버려도 하루 해가 더디고 더딘 것은 목 타게 기다리는 소망 때문일까. 초는 타기 위해 심지 하나를 지닌다. 생명도 타기 위해 심지 하나를 지닌다.
사랑이건 미움이건 타는 심지 없이는 죽은 나날이다.
그러나 습관처럼 해를 거듭하고 습관처럼 나이를 먹으면서 어느덧 감정은 동맥경화증을 일으키고 미움도 사랑도 아닌 분노도 연민도 아닌 적당과 요령의 탈을 수시로 바꿔 쓴다. 비가 오는 날은 비 맞을까 저어하여 두문불출하고 바람 센 날은 바람이 스산하여 칩거해 버린다. 길도 없는 풀숲을 헤매던 지난날의 패기는 흔적도 없이 누군가가 먼저 밟고 간 길, 적어도 어제쯤, 아니면 그제쯤 지나간 흔적이 보이는 길, 그래서 안전한 길을 골라 고작 남의 뒤를 따라가는 허약과 안일, 신앙도 그렇고 생활도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다치고 넘어지면서 닦아놓은 길을 나는 겨우겨우 주섬거리며 쫓아가는 것이 고작이다. 그렇게 뒤쫓아가는 길에서도 노상 회의하고 불안하여 심지 하나를 제대로 태우지 못하고 꺼뜨리기 일쑤다.「엠마오」로 가는 두 나그네처럼.
1977년 이제 또 한 해가 바뀐다. 해가 바뀐다는 일은 기실 얼마나 성가시고 귀찮은 일이냐. 이제까지의 몸에 익은 질서에서 익숙치 못한 새 질서로 옮겨 앉는 불안도 클 뿐더러 이제 싫어도 나이를 의식해야 하는 연대에 접어들고 보니 해가 바뀐다는 일은 그지없이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수시로 꺼지는 생명의 심지도 어쩌면 이런 데쯤에서 오는 자의식의 결과인지 모른다. 여하간 이제 남은 과제, 수시로 꺼지는 불 심지를 무엇으로 기름 부어 태울 것인가.
『아들아, 두려워 말라. 그대들을 홀로 남기지는 않으리니…』
이렇게 희망과 기쁨을 주시던 분「엠마오」로 향해 가는 두 나그네를 따라 가시며 남 몰래 일터 주시고 힘을 주시던 분, 그 지혜 있고 자애로운 분, 무궁무진한 화제를 가진 분에게 동행을 청한다면 나의 단조로운 나그네길도 즐겁고 밝으리라.
『주여 나와 함께 머물러 주소서. 나의 목적지는 아직 멀고 날은 어두었으니 등불을 받쳐 드신 당신 없이는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두 손으로 떼어 주실 그 빵 없이는 허기질 것입니다. 나와 함께 머무시어 수시로 꺼지는 생명의 심지에 불을 지펴 주소서. 나의 동행자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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