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와 인간의 자유
1, 섭리로서의 하느님의 신비에 깊이 들어가면서 우리는 흔히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만나게 된다.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 현존하시고 작용하신다면 인간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자유는 어떤 의미와 임무를 띠는가? 우리는 자유남용에서 나오는 악한 결과를 하느님의 섭리에 비추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진 피조물들은 창조주께서 그들에게 허락한 주유를 통해 『창조된 존재들의 자율성』을 누린다. 인간은 창조주께서 『그 자체를 위하여 원하신』(사목헌장 24) 유일한 가시적 피조물이다. 하느님의 초월적 지혜와 힘에 예속된 세계 속에서 인간은 그 최종목적을 하느님 안에 두고있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서 하나의 목적이기도 한 존재다. 한 사람의 인격으로서 인간은 자기자신의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그 힘으로 그는 자아실현을 지향한다. 의무이기도한 이 시선물을 받은 인간은 하느님 섭리의 신비에 싸여있다.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역사에, 인간사상과 자유의 역사에, 마음과 양심의 역사에 현존한다. 섭리는 인류의 역사, 개인과 공동체 역사속에 존재하는 영원한 「현존」이다. 창조된 모든 것이 섭리에 의해 『보살핌을 받고』다스려진다면 아버지다운 염려로 가득한 하느님의 권위는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들에 대한 최대의 자유존중을 뜻한다.
자유존중위해 죄 허용
2,창조된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너무나 본질적이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섭리안에서 인간의 죄를 허용하기까지 하신다. 인간은 그 자유를 하느님을 거슬러, 창조주를 거슬러 사용할 수 있다. 인간이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된 세계속에서 죄는 가능했을뿐 아니라 『아주 시초부터』실제적 사실로 나타났다. 죄는 하느님께 대한 근본적 반대다. 그것은 하느님이 결정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자유로운 존재들을 창조함으로써, 인간을 창조함으로써 죄를 허용하셨다. 죄는 창조된 자유를 남용한 결과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하느님의 초월적 자혜의 견지에서 전체 조물의 목적에 비워 죄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배제시킴으로써 세상에서 자유를 뺏기보다 그 남용을 무릅쓰면서라도 창조된 세상속에 자유가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끌어낼수 있다.
한편으로 죄를 허용하셨지만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다른 편으로 아버지로서의 사랑하는 염려와 더불어 그분은 영원으로부터 배상의 방법, 구속의 방법, 의화의 방법과 사랑을 통한 구원의 방법을 미리 내다보셨다. 자유는 실상 사랑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안의 예정의 신비
3,자기자신의 운명에 대한 질문은 인간마음의 깊은 관심사이다. 『내일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하는것은 크고 어려운 문제이지만 결정적인 질문이다. 본질적인 빛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다. 사실 산상설교에서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분은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오6,33)고 하셨다.
하느님의 섭리와 창조된 세계안에 이루어져야하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의 관계는 우리의 생각을 인간운명의 진실성, 그리스도 안에서의 예정에로 우리생각을 향하게 한다. 예정이란 말은 영원한 선택, 아버지답고, 지적이고 적극적인 선택, 사랑으로 재촉을 받은 선택을 뜻한다. 그 선택은 성바오로에 의하면 세상의 창조를 앞서고 세상안의 인간창조를 앞선다.『당신의 사랑으로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에페소1,4~5). 그러므로 예정속에는 바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인간의 영원한 소명이 담겨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은 세상창조에 있어서 그분의 첫 의도이며 동시에 최종 목적이다. 이 「나라」와 이 「의로움」을 수단으로해서 세상과 인간이 그리스도안에 지니고있는 영원한 예정이 성취되도록 한 것이다. 하느님의 섭리는 처음의 『그리스도안에서의 예정』이 인간역사의 『알파요 오메가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부활을 통해』결정적으로 성취될 『그 마지막에』 우리가 도달할 때까지 지치지 않고 일하고 있다.
세상의 악과 고통
4,세상의 악을 모두 경험하면서, 특히 무죄한 자들의 고통과 마주할 때 우리가 하느님은 악을 원하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 그리고 만일 그분께서 악을 원하신다면 어떻게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 이러한 질문을 두고 우리 역시 욥처럼 대답을 하기가 얼마나 곤란한지 느낀다.
그 대답은 우리안에서 찾지말고 겸손과 신롸로써 하느님 말씀안에서 찾다. 『지혜를 이겨낼수 이는 악이란 있을 수 없다』(지혜서7,30)는 성서의 보증은 창조주의 세상에 대한 섭리적 계획안에서 악이란 결국 선에 예속된다는 우리의 확신을 강화시켜준다.
물리적인 질서에 있어서의 악의 혀용에 대해서는 즉 무질적인 존재들은 부패가능하고 죽음을 겪는다는 사실을 두고 그것은 이러한 피조물들의 존재구조 자체에 속한다고 말해야 한다.
따라서 지혜서가 말하듯이 하느님께서 죽음을 만드시지 않았다면 그분은 물질적인 우주의 전반적인 선을 내다보고 그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윤리적인 악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반대된다. 만일 인간역사와 세계역사속에서 이악이 현존하고 압도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창조된 세계속에 자유가 있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 악은 다만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허락될 뿐이다. 자유로운 존재들이 창조주를 거슬러 그들의 자유를 남용하고 자유가 그때문에 윤리적 악에로 이끌 수 있는 사실보다 그분에게는 자유로운 존재들이 더 중요하고 기본적인 가치이다.
[교황님이 가르치는 교리-나자렛 예수] <95> <82~87요약>
섭리ㆍ자유ㆍ악과 고통
발행일1987-09-13 [제1571호, 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