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럽지 않을 네 아이들과 하늘같이 믿던 남편을 고스란히 조국에 바친 김은년 할머니(요안나ㆍ청주교구 사직본당)가 뼈저린 한(恨)과 원(怨)을 신앙으로 삼킨채 지난 7월 12일 이 세상을 조용히 하직했다.
향년 78세.
김은년 할머니의 장례미사가 봉헌된 사직성당에는 생전에 많은 도움과 보살핌을 받은 청소부 아저씨ㆍ전쟁미망인ㆍ고아들의 문상이 끊이지 않았고 각계에서 보내온 꽃다발만도 한골목을 가득채웠다.
정부에서 주는 연금을 받으면 제일 먼저 성당부터 찾아와 교무금을 바치고 가던 김은년 할머니, 김할머니의장례행렬이 이어진던 그날 하늘은 유난히도 맑았다.
죽을때나마 깨끗하게 거두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던 김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인지…
김은년 할머니는 1910년 충북괴산에서 출생했다.
16세때 경북상주의 민용철씨(당시23세)와 결혼, 해방후 청주로 이사오면서 6ㆍ25전까지 5남 5녀를 낳으며 가난하지만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6ㆍ25는 단란했던 가정을 송두리째 망가뜨렸다. 김할머니는 사랑하는 남편과 네 아들을 한꺼번에 잃는 엄청난 비극을 겪어야했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장남 종기(당시25세)는 육군하사로 입암지구에서, 차남 홍기(당시19세)는 경찰관으로 공비토벌 작전중에 전사했으며 3남 명기(당시16세)와 4남 인기(당시15세)는 학도병으로 각각 참전, 그해 9월 15일과 9월 6일 장렬히 산화했다.
또 당시 노무자였던 남편도 군에 입대. 2년뒤인 52년 6월 10일 금성지구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토록 안타까이 찾던 시신은 흔적도 없이 전사통지서와 군번만 적힌 목걸이만으로 시름을 달래야했던 김할머니는 망연자실 할 수 밖에 없던 현실속에서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막내아들과 당시 젖먹이였던 막내딸을 두고 그대로 죽을 수도, 울고 있을 수도 없었던 할머니는 이때부터 닥치는대로 막일을 하기 시작했다.
남의 집 빨래를 맡아하고 돌깨는 일, 유모 등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험한 일을 하면서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다섯딸과 막내 아들을 공부시키던 할머니의 61년 5월 북문로성당에서 처음 하느님을 접하게 됐다.
당시 주임신부이던 유후레드릭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할머니는 이듬해 5월 견진성사를 받고 절박하게 하느님께 매달렸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남편과 네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허전함을 메꿀 수 없던 할머니는 종종 위패가 안치된 국립묘지를 찾아 시름을 달래곤 했으나 오히려 외로움은 더해가기만 했다.
이러한 김할머니에게 또 다른 비운이 찾아왔다. 청주 시청에 근무하던 막내아들 태기씨마저 76년 두 손녀딸을 남기고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한 대(代)가 끊기는 아픔속에서 매일 새벽미사에 참례하고 기도하는 신앙의 힘으로써 그 고통을 근근히 이겨낸 김할머니는 자신의 애정을 전쟁미망인들과 고아들에게 쏟기 시작했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자리서 입었던 옷을 벗을줄만큼 물질적ㆍ정신적 도움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 공로로「5ㆍ16민족상」「안전보장부문장려상」「장한어머니상」「국민훈장동백장」을 받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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