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앞에 인간은 질문제기
4.고통은 이 수많은 형태의 악을 체험함으로써 인간안의 배태됩니다. 동물들도 감각과 상대적인 감성을 부여받은만큼 어떤 식으로 고통은 동물들안에서도 발견될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안에서 고통은 인간이 소유하고있는 영적 기능들의 고유한 차원에 도달합니다. 인간안에서 고통은 자기 존재의 전체차원, 그리고 행위와 반응, 수용과 거부의 능력이라는 전체차원으로 내면화되고 내밀하게 알려지고 경험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끔찍한 경험입니다. 그 앞에서 특히 탓이 없을 때 인간은 저 어렵고 괴롭고 때로는 극적인 질문들을 제기합니다. 그 질문들은 때때로 불평, 때로는 도전, 때로는 하느님과 그분의 섭리르 거부하는 외침이 됩니다. 그것들은 다음과같이 요약될 수 있는 질문들과 문제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서에서 하느님께 해당하시키는 사랑에 찬자부적 염려를 어떻게 악과 고통과 조화시킬수 있겠는가?그것들을 어떻게 창조주의 초월적 지혜와 전능과 조화시켜야 하는가? 그리고 더욱더 변증법적인 형태로 질문합니다. 세상의 악을 모두 경험하면서 특히 무죄한 자들의 고통과 마주할 때 우리가 하느님은 악을 원하시지 않는다고 말할수 있는가? 그리고 만일 그분께서 악을 원하신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이 사랑은 전능하실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습니다.
인간의 고통과 영광
5, 이러한 질문을 두고 우리 역시 욥처럼 대답을 하기가 얼마나 곤란한지 느낍니다. 그 대답을 우리자신안에서 찾지 말고 겸손과 신뢰로써 하느님의 말씀안에서 찾읍시다. 이미 구약에서 우리는 감동적이고 의미심장한 말씀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혜를 겨낼수 있는 악이란 있을 수 없다. 지혜는 세상끝에서 끝까지 펼쳐지며 모든 것을 훌륭하게 다스린다』(지혜서7,30:8,1). 세상속의 악과 고통의 여러가지 체험을 하면서 구약은 벌써 지혜와 하느님의 선성의 우위성을 증언하고 하느님의 섭리를 증언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욥서에 서술되고 전개되어 있습니다. 욥서는 때때로 의로운 사람에게 엄청난 시련으로 바치지만 하느님이 선하시다는, 힘들여 얻은 확신에 의해서 극복되는 악과 고통이라는 주제에 온전히 비쳐진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창조된 사물들의 한계와 덧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형태의 물리적「악」은 (선의 결핍이나 한계 때문에) 창조된 존재들의 구조 자체에 속합니다. 창조된 존재들은 본성상 우연적이고 지나가는것이며 따라서 부패가능한것입니다. 그외에도 우리는 물질적인 존재들이 『한 존재의 죽음은 다른것의 삶』(Corruptio unjusest generatio alterius)이라는 옛속담으로 표현된듯이 밀접한 상호의 존성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 죽음은 삶에 이바지합니다. 이러한 법칙은 인간이 동시에 동물이고 사멸하면서 불멸하는 영적존재인만큼 인간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러나 이에대해 성바오로의 말씀은 훨씬더 폭넓은 지평을 열어줍니다. 『우리의 외적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인간은 나날이 새로와지고있습니다』(Ⅱ고린토4,17)그리고 또 『우리는 지금 잠시동안 가벼운 고난을 겪고있지만 그것은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줄 것입니다』(상동).
하느님은 선을 내다보고 죽음 허락
6. 『지혜를 이겨낼수 있는 악이란 있을수 없다』(지혜서 7,30)는 성서의 보증은 창조주의 세상에 대한 섭리적계획안에서 악이란 결국 선에 예속된다는 우리의 확신을 강화시켜줍니다. 더우기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온전한 진리의 맥락에서 우리는 다음의 두 말씀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도움을 받습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악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말과 『하느님은 악을 허락하신다』는 말입니다. 첫째 말씀에 대해서 『하느님은 죽음을 만드시지 않았고 신자들의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살라고 만드셨기 때문이다』(지혜1,13~14)라는 지혜서의 말씀을 상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리적인 질서에 있어서의 악의 허용에 대해서는 즉 물질적인 존재를 (인간의 몸도 그들 가운데 들어간다)은 부패가능하고 죽음을 겪는다는 사실을 두고 그것은 이러한 피조물들의 존재구조 자체에 속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다른편으로 물질적인 세계의 현상태에서 모든 유형한 개별존재의 무한한 실존을 생각하기란 어려울것입니다. 따라서 지혜서가 말하듯이 하느님께서 죽음을 만드시지 않았다면 그분은 물질적인 우주의 전반적인 선을 내다보고 그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유의 가치 때문에
하느님은 원치않는 악허용
7, 그러나 윤리적인 악의 경우 즉 물리적인 질서속에도 여러형태와 결과로 나타나는 죄와 탓의 경우 이러한 악은 결정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하느님에 의해서 의도된 것이 아닙니다. 윤리적인 악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의지와 반대됩니다. 만일 인간역사와 세계역사속에서 이 악이 현존하고 때로는 압도한다면, 어떤 의미로 이 악이 자기자신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창조된 세계속에 자유가 있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 악은 다만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허락될뿐입니다. 창조된 자유의 존재(따라서 인간의 존재, 우리가 나중에 이야기하게 될 천사와 같은 순수 영들의 존재도)는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과 일치되는 창조의 충만함을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합니다. (이미 우리가 앞의 교리에서 말했듯이) 하느님께서 창조속에 실현 되기를 원하시는 선의 충만함 때문에 자유로운 유(有)들의 존재는 그런 존재들이 창조주를 거슬러 그들의 자유를 납용하고 자유가 그 때문에 윤리적 악에로 이끌수 있는 사실보다 그분에게는 더 중요하고 기본적인 가치입니다.
틀림없이 그것은 악을 원하지 않으면서 더 큰선을 내다보고 악을 참아주는 하는님섭리의 신비에 대하여 우리가 이성과 계시로부터 받는 하나의 큰 빛입니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빛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로부터 만 우리에게 올 수 있습니다. 다음에 그것을 다루겠습니다.
[교황님이 가르치는 교리 - 나자렛 예수] 87. 세상의 악과 고통 (하)
발행일1987-06-28 [제1561호, 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