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통해 믿음 정화돼
1, 지난번 교리끝에 언급했던 성 베드로의 첫째서간을 다시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는님을 찬양합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다시 낳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산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위하여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않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다시 낳아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산 희망을 안겨주셨읍니다』(I베드로 1,3~4).
같은 베드로 사도는 더 나아가 위로되는 명백한 말씀을 합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하기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I베드로, 6~7)
이본 문에서 창조된 세계와 특히 인간의 그리스도안에서의 「예정」에 대해 계시된 진리는 인간생활에서 너무나 많은 형태아래 현존하는 악과 고통의 실재와 하느님의 섭리와의 관계라는 주제에 관해 제시하고자하는 생각들의 필요불가결한 주요기초를 이룬다고 주장할 수 있읍니다.
세상의 악과 고통 때문에 섭리 의심
2,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진리를 받아들이는데 어려운 점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런 어려움이 세상의 악과 고통 때문에 하느님을 비난하기까지 하고 하느님과 그분의 존재에 대한 진리 자체를 거부하는데까지 이르게되는 (즉 무신론) 극단적 형태를 취합니다.
덜 곤란한 것은 아니지만 덜 극단적인 형태에서 이런 어려움은 인간이 하느님께 묻는수많은 비판적인 질문들 속에 표현됩니다. 의혹, 의문이나 다툼은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진리, 창조된 세계를 위한 하느님의 목자적 열려와, 여러방법으로 사람들이 경험하는 악과 고통의 실재와 조화를 시키기 어려운데서 나옵니다.
악과 고통의 실재에 대한 시각은 성서 여러 곳에 완전하게 나옵니다. 성서는 무엇보다 고통에 대한 위대한 책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여러가지 모양으로…예언자들을 시켜…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히브리1,1참조) 인류에게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들의 범위내에 전국적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아계시 맥락속에 들어가며 복음 또는 구원의 기쁜소식의 맥락속에 들어갑니다.
이 때문에 세상에 악과 고통에 대한 질문에 대한 응답을 발견하는 유일한 적절한 방법은「하느님의 말씀」이 제공하는 계시의 맥락속에서 그것을 찾는 것입니다.
악은 여러 형태로
3,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악과 고통에 대해 아주 분명해야 합니다. 악은 그자체로 여러 형태입니다. 일반적으로 물리적 의미의 악과 윤리적 의미의 악을 구별합니다.
윤리적 악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있고 항상 영적 성격을 띤 악이므로 가책을 내포한다는 사실로해서 물리적 악과 구별됩니다.
그것은 물리적 악이 인간에 의해 저질러질 수 없거나 인간의 잘못에서 나오는 결과일수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반드시 그리고 직접적으로 인간의 의지를 내포하지는 않기 때문에 물리적 악과 구별됩니다.
때로는 무지나 경솔함 때문에 때로는 적절한 주의를 소홀히함으로써나 부적합하고 해로운 행위들에 의해서도 인간이 저지르는 물리적 악이 많은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간과 따로 떨어져 일어나는 물리적악이 세상에 많다는 것을 부언해두어야 합니다. 예를들어 자연 재앙들이나 재난들 인간에게 탓이없는 모든 형태의 신체장애나 신체적 질병이나 정신적 질병들을 말합니다.
[교황님이 가르치는 교리 - 나자렛 예수] 86. 세상의 악과 고통 (상)
발행일1987-06-21 [제1560호, 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