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는 창조사업 앞서
1. 섭리로서의 하느님의 신비에 깊이 들어가면서 우리는 다음의 질문을 흔히 만나게 된다.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 현존하시고 작용하신다면 인간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자유는 어떤 의미와 임무를 띠는가? 우리는 자유남용에서 나오는 죄의 악한 결과를 하느님의 섭리에 비추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1차 바티깐 공의회의 장엄한 선언을 다시 봅시다.『하느님은 창조하신 모든 것을 당신 섭리로 지켜주시고 다스리신다.「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펼치며 모든 것을 훌륭하게 다스린다」(지혜서8, 1참조). 「하느님의 눈앞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히브리4, 13참조). 피조물들의 자유로운 주도권을 통해 일어날 일까지도』(DS3003).
하느님 섭리의 신비는 창조 사업 전체 속에 깊이 새겨져 있읍니다. 하느님의 영원한 지혜의 표현인 섭리의 계획은 창조사업을 앞섭니다. 그 분의 영원한 능력의 표현으로서 그것은 창조사업을 주재하고 그것이 효력을 내게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로 섭리가 그 안에 실현된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그것은 초월적인 섭리지만 동시에 사물 속에, 모든 것 속에 내재적인 섭리입니다. 우리가 읽은 공의회 본문에 따르면 지성과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피조물들의 질서에 특히 이것이 해당됩니다.
인간은 자유 등에 자율성 누려
2. 피조들 전체를「힘차게」구성하고「훌륭하게」배치시키면서「섭리」께서는 하느님의 모상과 모습으로 만들어진 피조물들을 특별한 방법으로 포옹합니다. 그들은 2차 바티깐 공의회가 뜻하는 의미로(사목헌장 36 참조) 창조주께서 그들에게 허락한 자유를 통해 『창조된 존재들의 자율성』을 누립니다. 이러한 피조물들의 영역 안에는 순수 영적본성으로 창조된 존재들이 표함돼야 합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구성합니다. 볼 수 있는 세계에서는 하느님 섭리의 특별한 관심을 끄는 대상이 인간입니다. 2차 바티깐공의회 가르침에 의하면 「인간」은 『이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신 유일한 피조물』(사목헌장 24)이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줌으로써만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있다』(사목헌장 24 참조).
하느님의 사랑하올 지혜
3. 볼 수 있는 세계가 인간창조로 마지막 장식이 됐다는 사실은 하느님 섭리의 신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전망을 우리 앞에 펼쳐줍니다. 그것은 1차 바티깐 공의회의 교의선언이 하느님의 눈앞에는 모든 것이「드러나게」(「열려있게」), 어떤 의미로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마련이라고-이성적 피조물이 자기 자유의 능력으로 하는 것까지도, 인간의 의식적 선택과 자유로운 결정의 결과까지도 드러나게 마련이라고 강조할 때 암시되어 있읍니다. 이런 영역에 대해서까지도 하느님의 섭리는 그 탁월한 창조적 인과관계와 조정하는 인과관계를 보존합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지혜의 초월적 우월성이며 사랑을 통해서 그것은 힘차고 부드럽게 활동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그토록 풍요롭게 꾸민 자기 자신의 피조물을 한편으로 그 자유를 존중하면서 아버지답게 보살피며 그 목적에로 인도하고 지탱해주고 이끌어주는 섭리입니다.
세계는 인간 안에서 하느님께로
4. 이 하느님의 창조족인 영원한 계획과 인간자유가 만나는 지점에서 경배스러운 만큼 또한 헤아리기 어려운 신비가 틀림없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 신비는 하느님의 활동과 인간의 자아 결정과의 내밀한 관계, 무엇보다 먼저 존재론적이고 그 다음에 심리적인 관계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 결정의 자유가 이성적 피조물의 본성적 역동성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 있읍니다. 우리는 또한 인간자유가 비록 상처받고 약한 것이긴 해도 참다운 자유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읍니다. 자유와 하느님의 원인성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그 고유의 목적에로 정돈하는 하느님 지혜의 표현이라는 섭리개념을 강조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상기하는 것이 좋습니다(ratio ordinis rerum in finem)『사물들을 그 목적을 향해 이성적으로 정돈하는 것』(summaⅠ22, 1)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시는 모든 것은 이 목적을 받으며 따라서 하느님 섭리의 대상이 됩니다(상동Ⅰ, 22, 2참조). 인간-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안에서 볼 수 있는 피조물전체가 다시 그 결정적 완성의 길을 찾으면서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여러 사람들 가운데 성이레네오께서 이미 표현한 이러한 생각은 인류의 작업으로 세계가 발전한다는 2차 바티깐 공의회의 가르침에 의해 메아리됩니다. 진정한 발전 즉 진보-인간이 세상에서 이루도록 부름받고 있는-는 창조된 세계 속에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시키기 위해 단순히 『기술적인』것 뿐 아니라 특별히『윤리적인』특성을 띠어야 합니다(사목헌장35, 43, 57, 62참조).
[교황님이 가르치는 교리 - 나자렛 예수] 82. 섭리와 인간의 자유 (상)
발행일1987-05-24 [제1556호, 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