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뜨르 성 바오로 수도회는 9월 15일 한국진출 1백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본보는 수도회 진출 1백주년을 맞아 한국교회 안에서의 수도회 1백년사를 정리해보고 한국수도회 제2세기를 진단하는 특별기획시리즈를 마련, 수회에 걸쳐 게재하고자 한다.
1백주년을 맞으며
교회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로 구성된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이며 이들 모두는 각자 고유한 영성과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교의헌장 에서는 말하고 있다. 이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를 이루는 세 가지 요소 가운데 한국에서 전개된 수도생활의 역사는 이제 꼭 1백년전 이 땅에서는 프랑스에 모원을 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수도자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로써 한국교회에서도 성직자나 평신도의 삶과 영성과는 구별되는 수도생활이 그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이들의 기도화 봉사를 통해 민족의 복음화를 위한 자신의 사명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는 저력을 얻게 되었다.
1888년 7월 22일 프랑스와 중국의 국적을 가진 4명의 수녀들이 제물포항구에 도착했다.
그들의 국적은 각기 프랑스나 중국이었지만 이제 그들은 한국교회의 일부가 되어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입국한지 일주일후에 다섯명의 한국인 수녀지원자들과 함께 공동체생활을 시작했다. 청빈과 정결과 순명을 서약한 이수도공동체의 탄생은 한국교회 안에서 수도생활의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창설 1백주년은 수녀회 자체의 경사일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경사이다. 이 경사를 맞아 수녀회 1백년의 발자취와 함께 그 교회사적 의미를 검토해봄으로써 이 땅에서 전개되는 수도적 삶의 발전을 기원해 보고자 한다.
걸어온 길 1백년
17세기 말엽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 르베빌에서 그곳의 본당신부였던 루이ㆍ쇼베는 가난한 어린이를 교육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하나의 수녀회를 창설했다. 이렇게 창설된 수녀회는 그 후 18~19세기를 통해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으로 그 봉사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우리나라 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얻은 직후 조선교구의 교구장 블랑 주교는 고아들의 양육과 아동들의 교육을 위해 이 수녀회의 수녀들을 초빙했고, 이로써 한국에서도 수도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 한국에 입국한 직후에 그들은 종현에 있던 고아원을 인수하여 운영했으며, 1894년에는 제물포에도 수녀원을 설립하고 시약소를 설치하는 한편 고아들을 돌보게 되었다. 또한 곧이어 약현성당의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침으로써, 그들은 창립자의 정신과 수도회의 고유한 카리스마에 따라 이 땅에서 새로운 삶의 형태를 실천해나갔다.
수녀회의 봉사는 개화기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줄곧 지속되었다. 수녀들이 활동하던 지역이 북쪽으로는 평양에서부터 남쪽제주도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고, 서울ㆍ대구와 같은 큰 도시에서 뿐만 아니라 황해도 매화동이나 전라도의 궁벽한 산골에서도 그들은 복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이들의 봉사활동에도 많은 제한이 가해졌다. 식민지시대에 반포되었던「조선교육령」은 수녀들이 본당의 학교에서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어렵게 했다. 일제는 수녀들의 자유로운 포교활동에도 제한을 가하였고, 분원에 수녀들이 파견 될 때에도 식민지 당국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수녀들은 불우한 이웃의 벗이 되기 위해 스스로 봉사하는 자세를 포기하지 않았다.
8ㆍ15해방은 수녀회에도 큰 기쁨이 되었다. 해방이후 수녀회는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맞이하여 한국관구가 독립되었다. 그러나 6ㆍ25한국전쟁의 과정에서 수녀회는 남다른 시련을 겪게 되었고 매화동 분원에 파견되었던 2명의 수녀가 순교했으며 한국관구의 천 관구장이었던 베아트릭스 수녀는 악명 높은「죽음의 행진」을 하던 중 피살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은 수녀회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하여 휴전 이후 수녀회의 발전은 거듭되었고 1960년에는 한국인 첫 관구장이 탄생하여 수녀회는 비약의 계기를 맞이했다.
또한 1967년에는 서울관구와 대구 관구로 발전적 분리를 단행한 후 오늘에 이르러 모두7백70명의 수녀들이 학교와 유치원 병원과 각종 사회사업기관 그리고 본당에서 봉사의 삶을 살고 있다.
1백년의 의미
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지난 10년 동안 이 땅에서 축성된 생활, 봉헌된 삶을 살아왔다. 이 수녀회의 한국진출과 그 백년의 역사는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적지 않은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수녀회의 한국진출이 갖는 첫 번째 의미로는 수도생활의 영성을 한국교회에 전파시켜 주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물론 한국교회사의 초기부분을 보면 강완숙을 비롯한 일단의 여성들이 함께 모여 기도와 봉사의 삶을 살았던 사례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완전한 의미에서 축성되고 봉헌된 삶은 아니었다. 그들은 수도적 삶을 그리워했지만 복음 3덕을 서원한 수도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소망은 우리 교회전통의 일부를 이루어 1888년 이후 새롭게 전진시키는 데에 밑거름이 되었다.
이 역사전통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교회에서는 수도적 삶이 발전될 수 있었지만, 그 말 전의 직접적 계기는 샬트르 성 바오로수녀회의 한국진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진복 8단의정신이 아니고서는 세상을 변형시킬 수도 없고 하느님께 봉헌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며』(교회헌장31조), 이 세상에 이미 현존하는 천상보화와 풍부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제시하고 모든 신자들이 고대하는 천국의 영광을 예고해주는 수도자의 삶과 영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의 삶과 영성을 통해서 우리교회는 더욱 풍요로워지고 성숙할 수 있는 계기를 맞을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수녀회가 걸어온 봉사와 투신의 삶이 한국인의 구원과 한국교회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수녀회로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른 인간구원에 투신해왔다. 그들의 봉사를 통해 우리교회는 의료와 교육사업을 효율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간접선교는 한국인의 마음에 하느님의 말씀을 심는데에 매우 큰 기능을 담당할 수 있었다. 또한 수녀들은 본당에서 직접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들의 봉사를 통해 많은 이들이 복음을 전수받았고,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장에는 그들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백년의 역사에 한국교회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수녀회에서도 2백년의 역사가 말해주는 의미를 더욱 키워나가고 이로써 한국가톨릭문화의 발전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자신을 투신해 가기를 기원한다. 이로써 수녀회는 앞으로 맞게 될 또 다른 1백년의 역사를 더욱 알차게 가꾸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