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 저는 모자라는 점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차제에 상을 받게 되니 그저 부끄러울 뿐입니다』
새싹회가 제정환 제28회「장한 어머니상」을 받는 권화자(수산나ㆍ가락동본당48)씨.
시집「오뚜기의 기도」를 펴낸 뇌성마비 시인 황지형군(다니엘ㆍ25)을 맏아들로 둔 권화자씨는 지형군을 키워온 지난날이 마치 꿈과 같다며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자신은 늘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왔다고 밝게 말했다.
『항상 지형이에게 취해서 살았습니다. 남들이 정상적인 자기 아이들의 성적이나 능력을 얘기할 때면 나는 지형이 자랑을 했습니다』
태어날 때 유난히 예쁘게 생겼던 지형군은 생후 1백일째 심하게 울고난 뒤 황달에 걸면서 뇌신경이 손상, 지금과 같은 심한 뇌성마비 장애자가 됐다.
마냥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던 권화자씨에게 사랑의 첫결실인 지형군이 뇌성마비라는 사실은 말 그대로 「청천벽력」일 수밖에 없었으나 권씨는 이에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찾아나섰다.
다행히도 지형군이 육체는 장애가 있지만 정신에는 장애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실날같은 희망을 붙잡았다.
지형군이 태어난 65년 무렵만 해도 장애자에 대한 사회인식이나 자료가 거의 없던 때라 어려움이 많았지만 권화자씨는 영주군청 공보요원을 지낸 경험을 살려 닥치는 대로 장애자 관련 자료 책자를 찾아 읽었고 지형군을 보행기에 앉혀놓고 나름대로「시청각교육」을 위해 흥부놀부전ㆍ심청전ㆍ장화흥련전 등을 들려주었다.
지형군이 입학 연령인 8세가 되자 체계적인 재활교육을 위해 교육과 숙식을 함께하는 삼육재활원에 입학을 시켰다.
아들에 대한 정이 남달랐던 권씨는 지형군을 떼어놓던 당시 심정을「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라고 기억했다.
하지만 지형군은 그 교육에 힘입어 「마치 문어같이 걷지 못하고 돌아가던 상태」에서 14살에 마침내 첫걸음을 떼어놓을 수 있게 됐고 85년 삼육재활고등학교까지 무사히 마쳤다.
이 기나긴 교육기간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어머니 권씨가 지형군을 있는 그대로 한 인격체로서 인정해주었다는 것과 끊임없는 사랑으로 뒷받침했다는 것.
『장애자라고 해서 이러면 않되겠지, 이러면 좋겠지 하고 부모 마음대로 하려고 해서는 않됩니다. 언제나 본인의 의견을 따라야 합니다. 많은 장애자 부모들이 아이가 원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가슴이 아픕니다』
장애자로 태어난 사람이 자기 자신의 장애를 발견했을 때 얼마나 큰 절망을 느끼겠느냐고 반문하는 권화자씨는 『지형이의 마음 저변에 흐르고 있는 설움을 같이 느끼고 나누려했던 것이 우리 모자 사이에서는 가장 중요한 일치점』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사랑의 결실로 황지형군은 87년 9월「한 뇌성마비 젊은이의 온몸으로 씌어진 시」라는 부제가 붙은「오뚜기의 기도」를 발간하고 어엿한 시인으로 등단했다.
황군은 80년에 지은 「엄마」라는 시 속에서 권화자씨를 「내 몸이 이래도 얼굴 한 번 안 찡그린 천사 같은 엄마」라고 그리고 있다.
『지형이 책이 나오던 날 이렇게 우리를 지키고 이끌어주신 하느님께 깊이깊이 감사드렸습니다』
권화자씨는 지형이가 이제 완전히 자아가 섰기 때문에 자기 앞길을 잘 개척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하면서『지형이의 시심은 사랑에 바탕한 마음이고 그 근간에는 신앙이 깔려있다』고 설명했다.
큰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권화자씨는 남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희망차고 신나는 삶을 이끌어 왔지만 장애자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에 이르러서는 평범한 장애자 부모로서의 안타까움을 털어놓았다.
『때때로 지형이 때문에 강연회에 나가서 큰 소리로 장애자 문제를 얘기하지만 연단을 내려올 때는 그렇게 고독하고 허무할 수가 없어요. 제가 바라는 건 더도 덜도 말고 지형이 같은 장애자들이 사회에서 똑같이 인정받는 것입니다. 이들이 마음과 육체적으로 불편하지 않도록 제도와 시설이 갖춰져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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