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섭리의 유기적 관계
1,『나는 한분의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믿나이다』.신경의 첫 조목은 그엄청난 부요함을 우리에게 아직 다 드러내지 않았읍니다. 사실 세상의 창조주(『볼 수 있는 것들과 볼 수 없는 것들』)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과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읍니다.
「창조」에 대한 고찰에서 오늘 우리는 크리스찬 신앙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신앙에 부름받은 사람의 마음속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주제에 대해 일련의 교리를 시작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섭리」라는 주제입니다. 또는 지혜로우시고 저능하신 아버지로서의 하느님께서 세상속에, 모든 피조물의 역사속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어 모든 피조물, 특히 당신의 모상인 인간이 진리와 사랑의 인도아래 하느님 안에있는 영원한 삶이라는 목표를 향하는 여정으로서의 장기의 삶을 살수 있도록 해주시는 면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왜 인간을 창조했는가?』
그리스도교 교리에서 전통적으로 이런 질문을 합니다.『왜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하셨는가?』어른이든지 어린이든지 우리는『하느님꼐서 이세상에서 당신을 알고 사랑하여 저세상에서 당신과 영원토록 행복을 누리게 하기위해 우리를 창조하셨다』고 대답하거나 이와 비슷한 대답을 합니다.
그렇지만 평온한 모습과 확실한 손길로 우리의 역사를 인도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특별한 진리가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마음속에 두개의 갈등을 빚는 감정이 자리하고있음을 보게됩니다.『차라리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품에 안겨있는 어린이 인듯 평온하나이다』라고 말하는 시편(131/130,2) 저자의 말씀처럼 한편으로 인간은 이섭리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그런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게 됩니다.그렇지만 다른 편으로 인간은 자기 생명의 주인이시며 구세주로서의 하느님께 자신을 내던지기를 두려워하고 망설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물들로해서 복잡해져 창조주를 잊어버리기 때문이거나 고통 때문에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에 대해 회의를 품고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두 경우 모두 하느님의 섭리가 인간에게 회의를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것이 인간의 상황이어서 성서에서도 욥은 숨김없는 신뢰심을 가지고 하느님앞에서 거침없이 불평을 늘어 놓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하느님의 말씀은「섭리」가 바로 당신 자녀들의 불평속에 표현된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육체적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고통을 당하던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그분이 어디 계신지 알기만하면, 당장에 찾아가서 나의 정담함을 진술하겠네. 반증할 말도 궁하지는 않으려만!』(욥기23,3~4)
하느님은 섭리하시는가?
2,참으로 인류역사 전체에 걸쳐, 철학자들의 사상속에서든지 위대한 종교들의 가르침 속에서든지 시정잡인의 단순한 생각 속에서든지 인간에게는 세상속에서의 하느님의 활동을 이해하려는 근거, 아니 그보다 정당화하려는 근거가 충분히 있었읍니다.
여러가지 해결책들이 있는데 모든 해결책들이 다 받아들일만한 것은 명백히 아니며 어느것 하나도 완전한 해결책은 아닙니다. 고대로부터 맹목적이고 종잡을 수 없는 숙명이나 운명, 눈에 보이지않는 행운에 호소를 한 사람들이 있었읍니다. 하느님을 긍정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양보한 사람들이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 특히 우리 당대 사람들은 인간긍정과 인간의 자유긍정은 신(神) 부정을 함축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은 극단적이고 일방적인 해결책들인데 우리가『하느님의 섭리』를 이야기 할때 얼마나 심오한 삶의 문제들이 개입되는지를 최소한 우리로 하여금 이해하게 해줍니다. 하느님의 전능은 어떻게 우리의 자유와 조화를 이루게되는지, 그리고 우리의 자유는 그분의 그르칠 수 없는 규정들과 어떻게 조화되는지? 우리의 미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윤리적 죄악과 무죄한 이들의 고통 등 세상의 악을 두고 그분의 무한한 지혜와 선하심을 어떻게 해석하고 인식해야 하는가? 수세기의 사건들, 무서운 재앙들과 위대함과 거룩함의 고상한 행위들을 통해 전개되는 우리의 역사…그 모든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모든 삶을 영원토록 묻어버릴 최후의 대홍수가 아니면 결코 도착점 없이 모든 것이 영원토록 숙명적으로 출발점에 되돌아 오는가? 아니면 반대로-여기서 마음은 저 하잘것 없는 논리가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고 느낍니다-우리를 지성과 섬세함과 지헤로 감싸주시고 창조가 최종적으로 완성된『제7일의』휴식(안식)을 향해 우리의 실존-세상,역사, 그분께 동의하기만 하면 우리의 반항적인 의지까지도-을 『힘차고 부드러운 손길로』이끄시는 분, 하느님이라 부르는 섭리적이고 긍정적인 존재가 있는가?
[교황님이 가르치는 교리 - 나자렛 예수] 76. 창조와 하느님의 섭리 (상)
발행일1987-03-08 [제1546호, 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