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한국교회 중인 역할 커
조선후기 경제생활의 진전은 필연적으로 양반중심의 중세적 신분제에 변화를 촉구하게 되었다. 그 변화의 촉구는 각 신분층의 계층내분과 현상과 하층민의 신분층의 계층내분화 현상과 하층민의 신분상승에 따른 신분이동 및 부자유신분층의 신분해방의 노력으로 나타나었다. 조선후기 사회에서 신분상승의 노력을 집요하게 추진한 계층은 양반서얼과 기술직 중인 그리고 부유서민층이었다. 이 가운데 중인들은 신분이동을 위한 중인통청운동을 추진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새로운 종교-천주교의 수용으로 분극화되었었다. 중인층의 천주신앙의 수용문제를 교회사적 측면보다 조선후기 사회의 탈성리학 사회동태와 연관시켜가며, 그것의 사회사적 의의를 규명해 보려고 한다.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적인물은 양반교인만은 아니었다. 중인층 신도들의 활동이 매우 컸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귀국한 후 보유유적 천주신앙의 학문적 깨우침에 접근해 있던 한국교회 창설의 멤버들이 처음 신앙집회를 가졌던 장소는 첫 영세 절차가 취해졌던 수표동 이벽의 집과 정기적 종교집회를 가지게된 명례동 소재의 중인교인인 김범우의 집이었다. 이벽이나 정약전·약용, 권일신과 같이 이승훈으로부터 영세한 김범우는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추회」의「도장주」로 지목되어 단양에 귀양갔으며 그곳에서 종생하였다. 그의 집에는 서울의 양반교인들만이 아니라 이존창·윤지충같은 지방교회의 중진들도 출입하였다. 한편 그의 집에는 한역교리서가 비치되어 있어 그것을 얻어 보고 입교하게 된 사람이 다수였다고 한다. 한편 그의 권면으로 천주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인물들이 많았다(최인철·최필공·김종교·허동·홍익만·변득중 등).
역관계 중인 성직자영입도
김범우의 신분은 중인역관이었음이 「역과방목」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그의 동생 현우는 주문모 신부 입국후 그의 집을 「첨례」 장소로 제공하여 다수 교인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신앙집회를 가지게 한점에서 초기교회에 기여를 했다.
성직자없이 출범한 한국교회를 위해 성직자 영입운동을 일으켰으며, 주신부 입국 후에는 그를 적극 돌보다가 「을묘실포사건」으로 체포되어 순교한 최인길도 역관가문 출신이었다. 보유론적 천주신앙의 이해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양반교인 다수가 1791년의 신해진산사건을 계기로 탈락한 후 초기 한국교회를 영도한 지도적 교인은 최창현이었다. 그는 중인이면서도 신도들의 대표로 활약하였고 「성경직해」를 한글번역하였으며, 교리서적을 전사보급하였고 주신부 입국후 총회장으로 교인을 대표했던 지도적 교인이었다. 「양박청래사」로 몰려 1801년에 순교하게 된 현계흠도 역관계 교인이었다.
주신부가 조선왕국에 숨어든후 박해받는 교회의 신앙활동을 위해 비밀신도조직으로 조직한 명도회의 핵심인물로 활동한 교인들 가운데 중인교인이 많았다. 홍익만 김려행 등이 육회 장소를 제공하였고 김이우 현계온 정광수 등은 첨례장소를 제공하여 신앙생활의 하부조직의 중핵인물로 초기교회의 발전에 기여했다.
관련중인의 기록자료 없어
중인층의 서교수용문제를 노함에 있어 가장 난점은 관련 중인들의 직접적 기록이 전혀 없고 관계사료의 기사가 매우 소략한 점이었다. 따라서 본고도 추론과 개연적 이해에 치우친 감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상의 논고를 통하여 조선후기 사회에서의 서교수용과 실천주제가 이벽·이승훈 등 양반지식인이었다는 종래의 통설을 바꾸어야 할 정도로 일부중인들이 초기교회와 관련되어 있음을 밝힐 수 있었다. 즉 역관 출신 중인 김범우는 이승훈·이벽과 같이 서교수용과 신앙운동 실천주체의 한 사람이었다. 성직자 없이 출발된 한국교회를 성직자있는 제 모습의 교회로 발전시키기에 힘쓴 최인길·지황의 공헌이 컸다. 한편 초기 교회대표였던 총회장 최창현 등의 중인교인을 빼놓고 초기교회를 논할 수 없다.
한편 역관계중인과 달리 큰거리에서 약국·약방을 경영하던 의약계 중인신도들의 공로도 크다.
그들은 약방·약국을 거점으로 명도회의 모임인 「육회」나 교인들의 미사 「첨례」의 신앙집회를 주도했고, 신도들의 교리교육을 주관했으며 전교활동에 진력하였다. 이들 의약계 중인교도들은 교회창설 후 교회발전을 추진한 중핵적 역군들이었다.
중인들 천주교 귀의율 높아
중인층의 서교귀의율은 다른사회 신분에 비해 비율적으로 매우 높은 것이었고, 대체로 중인 신도들이 주로 경향지방에 거주하였음을 통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런 역·의 중인은 기술직담당의 상위 중인이기에 외교실무나 의약지식 관계의 교양도 있고, 어느 정도의 국제적 안목도 있는 문화의식의 소유자들이었다.
한편 그들은 성리학에 대한 집념이 거의 없었으며, 역관무역·의약국 경영으로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경제기반도 튼튼한 계층이었다. 이러한 문화의식과 경제적 기반 및 비교적 활달한 개방의식을 지닐수 있었던 역·의계 中人들은 경직과 봉쇄로 치달리기만 하는 中世社會에서의 이탈을 모색하게 되었고, 신분과 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정신적 慰悅과 새로운 生의 희망을 추구하게 되었다.
조선후기 중인층의 이러한 새로운동향은 상대부문화(上大夫文化)로의 접근을 지향하는 위항문학 활동과 신분상승을 위한 중인통청운동과 모순과 혼돈의 현실에서 정신적위열과 귀의의 가치추구를 위한 서교수용과 신앙침잠으로 나타나게 된다. 의·역계일부 중인의 서교수용과 신앙실천이 종교적으로는 내세를, 사회적으로는 새로운 삶의 가치 추구라는 정신적 의미의 것이기는 하나, 위항문학활동·중인통청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할 조선후기사회 중인층의 한동향으로 파악되어야 할것이다.
(발표를 위해 간략된 본논문은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에서 발간된 「한국문화」 제8집에 수록되어있다.同書·PP 4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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