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거적을 가져와서 아네따 수녀를 그위에 눕힌뒤 북한에서 사용하는 두바퀴 달린 소달구지에 싣고서 끌고가 버렸다고 한다.
그때가 25일 주일 새벽 1시경이었다고… 집안의 남자 한사람이 억지로 따라갔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공산군이 그사람을 붙잡아서 버티면 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그가 돌아와서 베드로 수녀에게 한말은 군인들이 수난방면으로 가는듯 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네따 수녀와의 마지막이었다. 이것은 공산군이 38선을 넘어 남한을 공격할 때의 그 시각과 엇비슷한데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일어난 일이다.
케톨신부와 나는 11시 45분경에 사이호를 떠나 12시 30분에 성미카엘 성당에 도착했다. 오후 시간 대부분은 신자들과 이야기하는데 소비하고 타이어를 수리하기 위해 기림리의 제 5보급대 정비고에 들렸고 부대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는 헌트 신부와 슈타인바르 신부가 계셨던 일본인 지역으로 가서 건물상태를 둘러보았다. 늦은 시각이라 그런지 도시에는불빛이 없었다. 이 때문에 길가에서 간단히 살펴보았다. 성당과 부속건물들은 상당한 피해를 입은듯 했으나 명중된 흔적은 없었고 가까운 곳에 굉장한 포탄이 떨어졌던 것으로 보였다. 깜깜하고 황량한 거리를 지나 성 미카엘 성당으로 돌아왔다.
▲11월 3일 제 8군 사령부에 소위 김일성대학이라 부르는 새건물이 들어선적이 있는데 이 건물은 비거 박사의 숙소와 가까운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의 주택지역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비거박사댁은 진주만 공격 후에 우리들이 억류된 적이 있는 곳이다.
8군사령관 대리 콜로넬콜리어와 우리는 이곳의 도서관을 둘러보았다. 서가에 꽂인 수천의 장서들은 주로 덕원에 있던 독일계베네딕또 수도원의 도서실에서 옮겨놓은 것이었다. 또 어떤 책은 우리 선교회에서도 가져갔는데 그중의 두권은 내가 뽑아 건네준 것이다.
J·A월쉬가 P·J 버인에게 보낸 동방견문록 친필서명 복사판은 아마도 사이호 도서실에서 가져온 듯하고 M·에드워딘 수녀의 가톨릭성서는 평양 수련원에서 가져다 놓은 것이리라 짐작되었다. 콜로넬 콜리어가 군용트럭을 제공해주어서 우리는 남자신자들을 몇사람 동원하여 이 소중한 도서들을 차에 싣고 성미카엘성당 지하실 방으로 날랐다.
성미카엘 성당의 새건물은 5년에 걸쳐 완공되었는데 2차대전 후 주임이신 루도비꼬 신부가 지은 것들이다. 덕원 수도원에서 온베네딕또회 수도자들이 건물을 설계하고 감독했으며 많은 공을 들였음을 의심할 나위가 없다. 김신부님은 성당에 필요한 건축기금을 모으기 위해 교구전체를 돌아다녔고 또 신자들도 참으로 열과 성의를 다하여 보답했다. 그결과 붉은 벽돌로된 훌륭한 로마네스꼬식의「대성당」외형이 완공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대역사는 공산치하에서 더우기 당국의 허가를 받아서 이룩했다. 성미카엘성당의 옛건물은 진주만공격 이후 일본 당국이 고사포를 설치키 위해 길을 내는 바람에 헐렸던 것이다. 전쟁동안 정부는 이 성당에 대한 보상으로 프로케스탄트지역의 건물 하나를 가톨릭측에서 사용하도록 조치했다. 우리는 홍프란치스꼬(RIP)주교의 축성식이 정부측이 재차 주선해준 이도시의 어느 프로테스탄트교회에서 거행되었을 것으로 알고있다.
서울에서 우리는 평양에 새 성당을 짓는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의 불안한 정황으로 볼 때 다소 미심쩍기도했으나 성미카엘 성당은 옛건물이 대체되어야 할 필요성만은 인정하고 있던터였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성직자와 신도들 모두는 그들의 신앙과 열성을 굳게 믿고있었던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서울의 주교좌보다 더 큰 성당이었다.
서울에서 우리들이 예상한대로 사소한 장애가 큰 문제로 발전되고야 말았다. 건물이 완공된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만 정부에 몰수당하고만 것이다. 서울에서 우리가 예상한대로 사소한 장애가 큰문제로 발전되고야 말았다. 건물이 완공된지 불과 얼마지나지 않아서 그만 정부에 몰수당하고 만것이다. 우리가 평양에 도착했을때 보니 공산군이 건물전체를 2층으로 꾸미고 아래로부터 큰나무기둥들로 떠받쳐놓았으며 내부는 전부 교실 크기로 나누고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시키는 학교로 사용했던 것이다. 우리가 평양에 도착하면 여기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리라 예상했던 한국인 사제 14~15명은 한분도 찾지못했다. 그분들이 홍주교를 돕던 분들이다. 우리가 알기로 홍주교님은 몇달전에 벌써 공산군에 끌려가 투옥되었다. 그분은 강계지방의 어느 탄광에서 노동하신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평양 교우들 대부분은 홍주교님이 학살당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확실한 소식은 없지만…남한으로 탈출하신 세분의 성직자 가운데 김신부님은 안주에 생존해계신다. (11월 1일자 참조)
공산군에게 학살당했다고 알려진 분들 가운데는 김루도비꼬 신부와 평양의 서보니파시오 신부 안주의 이안셀모 박디모테오(평양). 여기의 지명은 체포될 당시의 성미카엘 새성당에서 튼 김루도비꼬 신부의 복사가 살해당했는데 앞서 말한 보니파시오 신부의 부친이신 서프란치스꼬(이분은 메리놀수녀회가 한국에서 활동할때 성실한「일꾼」으로 봉사했다)그리고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수녀이신 그분의 딸역시 희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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