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만큼 어둠도 짙다는 서울. 이 어둠에서 흘러나오는 슬픈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며 하루를 소일하는 노인이 있다.
서울 번동본당 빈첸시오협의회 부회장 이근호씨(68ㆍ스테파노).
깡마른 체구지만 계단오르기가 젊은이 못지않은 이씨는 자신의 나이를 잊은 듯 주변의 굶주리고 앓는 이들을 찾아 도닥거려 주느라 심심풀이 장기나 바둑을 뒤로 한지 이미 오래다.
86년 8월 15일 맏딸의 권유로 성당에 첫발을 들여놓은 이근호씨는 교리에 남달리 정통하거나 성서 귀절을 줄줄 외지는 못하지만 「세상은 함께 살아가는 곳」이라는 것과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사실만은 뚜렷이 의식하고 있다.
이씨는 『늦게 배운 도둑이 날새는 줄 모른다』는 고사를 인용, 『고희를 앞두고 늦게나마 불우한 이웃을 향한 연민의 정을 심어주신 하느님께 감사할 뿐』이라며 드러나기를 꺼려했다.
이근호씨는 천애고아가 된 소녀가장 은영이를 도와 1천만원짜리 전세방을 얻어주고 (본보 7월 22일자 10면) 은영이가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친할아버지가 되어주기로 한 장본인이다.
물론 이씨가 자신의 사재를 털어 소녀가장 은영이를 재정후원한 것은 아니다. 그도 역시 작은 용돈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노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근호씨는 『내가 가진 것이라곤 이 한몸뿐이고. 내가 하는 일이란 아침밥은 잘 먹었는지. 행여 비가 새지는 않았는지 둘러보고 같이 놀아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없이 봉사하는 이씨는 현재까지 23명의 불우이웃을 찾아 본당과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의 헌미 10가마니를 전달하고 혹시 쌀이 떨어져 굶고 있지는 않은지 수시로 둘러보고 인정을 쏟곤 한다.
이근호씨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 중 가장 슬펐던 일로 환자 김경재씨(안셀모ㆍ51)를 회상한다.
『돈이 없어 병원에 갈 엄두도 못내고 방에 웅크리고 있는 김씨를 설득시켜 병원에 데려갔으나 불치의 암일 가능성이 높다는 진단과 특수촬영비 30만원이 없어 다시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올 때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며 안경을 벗는다.
또한 이씨는 성당 앞에 사는 박영철씨(요셉ㆍ32)가 선천성 뇌성마비 환자임에도 불구, 생활보호대상자에 탈락되어 있음을 알고 진단서와 구비서류를 갖춰 한마음 한몸운동 입양 결연부에 제출해 매달 3만원씩 원조받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내 손이 닿은 곳에서 환한 웃음이 피어날 때면 내 손길 속에 숨어 일을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의 힘이 경이롭게 느껴온다』는 이씨는 자신과 맺어진 불우한 이웃을 위해 매일 아침저녁 하느님께 기도드린다고 말한다.
올해 소녀가장 은영이를 손주로 맞은 이근호씨. 그래서 이씨의 노년은 별로 외롭거나 고독하지 않다.
『불쌍한 이를 보면 눈물부터 나온다』는 여린 천성을 가진 이씨는 『건강만 허락한다면 죽는 순간까지 이 일을 계속하겠다』고 마음을 다진다.
10명의 똑똑한 악인보다는 1명의 우둔한 선인이 더 요구되는 세상. 9월의 수마가 할퀴고 간 자리에서 들려오는 애환의 소리는 제2 제3의 이근호씨 출현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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