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ㆍ포크ㆍ접시를 잘 보관하라는 승무원의 지시(?)를 들은 후 한참 짐 정리를 하고 있는데 또 다른 승무원이 와서는『꼬레아노』하면서 손가락으로 따라 오라는 시늉을 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승무원을 따라 갑판 쪽으로 계속 올라가니까 큰 식당이 나타났다. 아마 식사시간인가 보다 하고 식당 안으로 들어가보니 뷔페식으로 많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우리를 안내했던 승무원이 먹고 싶은 만큼 마음대로 먹으라고 해서 우리 일행은 마침 목도 마르고 출출하던 때라서 잘됐다 싶었는데 입에 맞는 것이 별로 없어서 먹을만한 것 몇가지만 접시에 담고는 자리를 찾았지만 식탁이 없었다.
지나가는 승무원한테 이런 사정얘기를 하니까 그 승무원은 침실에 가서 먹든 바닥에 앉아서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가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없이 침실에 가서 식사하기로 하여 음식을 들고 침실로 오는 도중에 휴게실 같은 작은 방이 있길래 일행 모두 거기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식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 앉자마자 일행 모두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마음아픈 일이 일어났다.
지금은 돌아가신 故이 효상 선생이 음식을 담은 접시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우리가 짐승보다 못한 거지인가』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 광경을 본 일행 전부는 눈물 때문에 아무도 식사를 하지 못했다.
눈물을 흘리면서 3등객실 손님인 탓에 이런 대우를 받는 우리처지를 생각하니 은근히 화가 치밀었지만 어쩔수 없이 참아야만 했다. 자꾸만 슬퍼오는 가슴을 주저할 길이 없어서 모두 음식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배는 고팠지만 바다에 내던져 버림으로써 조금이라도 슬픔을 달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을 지금도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지는듯이 아프고 잊을 수 없는 추억 아닌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 생각컨데 아마 처음부터 이렇게 푸대접 받고 고생할 줄 알았더라면 아무리 공부가 좋더라도 어느 누구도 유학을 떠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별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한가지를 들자면 3등실을 제외한 1ㆍ2등실에는 매점이 있었는데 3등실 승객은 여기서 물건도 사지 못하게 했다. 또 1ㆍ2등실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마치 인종차별을 하는 것처럼….
이런 와중에 같이 배를 탄 외국신부ㆍ수녀ㆍ신학생 몇명이 우리가 3등실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가끔씩 찾아와 주기도 하고 담배ㆍ포도주ㆍ간식 등을 사다주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홍콩으로 가는 도중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홍콩에 도착하자 마자 곧바로 이히지노 신부에게 전보를 띄웠다. 막연한 기대감에 싸여….
그런데 배가 홍콩을 출발하여 싱가폴을 향해 가는데 선장이 나를 부르더니 조금 전 프랑스에서 연락이 왔다면서 2등실로 옮기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체할 것 없이 2등실로 옮겼는데 이건 마치 천당과 지옥의 차이와 같았다. 모든 것이 깨끗하고 침실도 2인1실이었는데 책ㆍ걸상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베게와 이불이 있었던 것이 무척 기뻤다. 이때부터는 사람이 사는 것 같았다.
한가지 특별한 것은 1등실에는 약1백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홀이 있었는데 이곳에 조립식 제단을 설치해 놓고있었다. 그래서 나는 선장에게『나는 신부이기 때문에 매일 미사를 드려야 된다』고 말하고 제단 사용 허락을 받아 매일 아침 6시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미사를 봉헌했다.
드디어 배가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도착하기 한루 전날 모든 승객들은 무사히 도착하게 된 것을 무척 기뻐하며 큰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나는 한달동안 무사히 운항하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미사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모두에게 창미사를 바치자고 제의했다. 그래서 선장을 비롯한 1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선상에서 창미사를 봉헌했다.
마침내 오후 7시30분쯤 프랑스 마르세이유항에 도착했다. 승객 모두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다. 짐을 챙겨 배에서 내려오는데 이히지노 신부가 파리에서 마중나와 있었다. 이국땅에서 한국인을 만나니까 반가운 나머지 눈물이 나왔다.
[노사제의 회고] 제2대 마산교구장 장병화 주교 8.
3등실 푸대접으로 말못할 고생
무사히 프랑스도착…창미사 봉헌
발행일1990-07-15 [제1713호, 6면]